[알시르] 아오노 군 AU (1) - 연화님

그날은 유난히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 공기가 유난히 서늘했고 몸은 한없이 무거웠다. 등교하는 길에 차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쌩하니 달려가고,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자 기묘한 시선들이 다다닥 따라붙었다가 재빨리 흩어진다. 억누른 궁금증과 그 위를 덮은 동정. 도무지 가시지 않는 말, 말, 말. 사실대로 말하자면 오늘이 유난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르웰린의 일상이 삐걱거리기 시작한지는 조금 오래 되었다. 이유를 설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알터. 그 아이 때문이다.
주변에 사람이 다가오든 말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르웰린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사회생활의 중요성을 알았다. 같은 반, 옆자리, 무난하게 잘 다가오는 성격.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던 알터와 가까워진 건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다. 친해져둘만한 아이라고 판단했던 것도 같다. 예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언제나처럼 옳은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래, 그 아이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사고였다. 아마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을런지도 모르지. 알터 스스로는 티내지 않으려 했지만 사람의 그림자란 그리 쉽게 숨겨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거기서 파생되는 한없이 부정적인 생각의 줄기 역시도. 그리고 노련한 어른들도 금세 파악해낼만큼 예리하고 예민한 르웰린에게 아직 한참 어리숙한 알터의 그림자는 빤히 들여다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깊고 짙은 그림자와 알터의 사고 직후 잠시 떠돌던 소문을 떠올려보면 자연히 추측 하나가 성립된다. 아마 진실에 가까운 추측일 것이나 확인할 길은 없었다. 어른들은 늘 비밀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알기 부적절하다 판단되는 진실은 늘 왜곡되고 때로 미화되어 전해진다. 그리고 그건 보통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
하여 르웰린은 저를 둘러싸고 생겨나는 비밀이 쓸모없다 생각할지언정 굳이 그것을 파헤치지는 않았다. 기실 그것을 파헤치는 건 알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진짜 중요한 건 그의 옆자리가 비었다는 사실 하나 뿐이며 그가 해야할 건 추모이지 진실 찾기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기는 했다. 르웰린은 한 번도 알터의 존재를 그렇게 크게 느껴본 적이 없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는 주변 사람에 크게 가치를 두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빈 자리로 일상이 삐걱거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인생은 꼭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어쩌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인생에서 빠져나가서 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한 르웰린은 이번 학기 내내 비어있을 자리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Under love’s heavy burden do I sink. 사랑의 짐이 가진 무게 아래 나는 가라앉네.”
번갈아 이어지는 영어와 해석은 그것을 읊는 단조로운 목소리와 달리 점차 극적으로 치달았다. 르웰린을 포함한 모든 학생들이 내용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필기를 하기 바빴지만 말이다. 딱히 어려울 것 없는 내용임에도 늘 그래왔듯 기계적으로 설명을 받아적고 있으면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어느새 익숙해져버렸던 필기에 대한 감탄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리라. 하지만 습관이라는 건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수업이 끝난 뒤, 르웰린은 이제 보여줄 사람이 없는 필기를 확인하며 정문으로 향했다.
아침과 같은 스산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다 못해 노트를 떨어뜨리게 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바람이 하늘에서 땅으로 불기도 했던가? 애초에 방금 불어온 바람이 노트를 놓칠만큼 강한 바람이었나? 기묘한 표정으로 노트를 주워 흙먼지를 털자, 이번에는 바람 빠진 공이 땅에 질질 끌리며 밀려왔다. ‘구른다’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지나치게 제 형체를 잃은 공을 본 르웰린이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누군가의 질 나쁜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이상했다. 이건 누군가 의도한다고 해서 가능한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불가해하며 비일상적인 사건을 모른체하고 가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기어이 궁금증을 해소할 것인가. 짧은 고민은 대걸레가 스스로 벌떡 일어서더니 창고 방향을 가리키며 휙 쓰러지는 것과 함께 끝을 맺었다. 그는 이런 광경을 보고 모른척할만큼 지루한 사람이 아니었다. 르웰린이 대걸레가 쓰러진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자 조그마한 나뭇잎이 데굴데굴 발치까지 굴러왔다가 바람에 날아갔다. 그것이 마치 따라오라는 몸짓처럼 보였다면 미쳐간다는 신호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기묘한 직감이 그에게 한 번 시도해서 나쁠 것은 없다 속살여댔다. 아무 일도 없다면 잠시 뭔가에 홀렸던 하루가 될 것이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지 않겠는가. 해서 르웰린은 잠자코 나뭇잎을 따라 창고와 운동장 사이의 좁은 길에 다다랐다. 그리고 낯익은 소녀가 쓰려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손에 들고있던 노트 때문일까? 문득 영어 시간 내내 선생님이 읽어내리던 책이 귓가를 스쳤다. 죽음은 들판에서 가장 달콤한 꽃 위에 내린 때아닌 서리처럼 그녀 위에 놓여있다. (Death lies on her like an untimely frost upon the sweetest flower of all the field.) 비록 그는 로미오가 아니고, 소녀는 줄리엣이 아니지만 그 모습은 정말로 그렇게 보였다. 르웰린은 소녀를 멍하니 내려다보다 다급히 다가가 코 아래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주 얕지만 분명하게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다. 순간 긴장이 확 풀렸다. 뒤늦게 자신이 긴장했음을 깨달은 르웰린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연한 크림색의 세미롱 헤어, 새초롬한 눈매와 조금 창백해 보이는 피부. 그는 이 소녀를 알았다. 시이 리리아. 알터의 연인. 아마 그래서 죽음부터 연상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르웰린은 황량하기까지한 주변을 둘러보고 빠르게 다른 누군가 도와주러올 가능성을 지웠다. 어쩌다 이렇게 외진 곳까지 와서 쓰러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양호실이 여기서 얼마나 멀더라. 아마 안고서 못 갈 수준은 아닐 것이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르웰린은 자켓을 벗어 시이의 다리에 덮어준 뒤 그대로 안아 올렸다.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가볍고 말라있는 몸이 손쉽게 들려 올라왔다. 정말 어디에 홀린 것 같다 생각한 르웰린은 시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양호실까지 가서 하얀 침대 위에 그를 내려놓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기대와 달리 텅 빈 양호실을 서성이던 르웰린이 결국 사람을 불러오기 위해 문으로 향하려는 찰나 짧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말할 것도 없이 시이였다.
"깨어나셨나요?"
푸른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이더니 이내 초점을 찾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시이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기억이 나는듯, 아닌듯 그를 빤히 보던 시이는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확인하고서야 탄성을 냈다.
"어... 알터 친구?"
"기억하시는군요."
"몇 번 지나다니다 봤으니까. 르웰린이 데려온거야? 창고 근처에서 어지러워서 넘어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르웰린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시이를 발견하기까지 겪은 예의 기묘한 현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였다.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도 딱히 믿어지지는 않는데 누군가 믿어주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굳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필요는 없겠지. 다행히 시이는 그가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을 창고 뒤편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은 거기까지 궁금해할 기운이 없거나. 어느 쪽이든 르웰린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힘 없이 미소지으며 감사 인사를 하는 시이에게 어른을 불러오겠다 전한 르웰린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양호실을 나섰다.
이 기묘한 만남이 더이상 이어지지 않으리라 확신한 채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정확히 일주일만에 시이를 다시 만났다. 학교의 정문에서였다. 조금 놀란듯 동그랗게 떠진 푸른 눈을 본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쿵. 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은 심장이 이내 속도를 더해가며 박동하고 눈 앞이 새까맣게 변한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차례로 빼앗긴 온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르웰린은 자신의 몸이 통제를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정체불명의 힘과 의지의 싸움 끝에 그의 다리는 조금 기괴한 모양새로 시이에게 한발짝씩 다가선다. 시이에게 닿고 싶다는 하나의 감정이 너무 강렬해 당장이라도 휩쓸려 버릴 것만 같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시이가 그가 다가선 거리만큼 물러서자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네가 도망가면 안되는 거잖아. 비합리적인 생각에 이성이 점멸했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은 결국 그에게서 몸의 통제권을 완전히 앗아가 시이에게로 돌진한다. 피하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르웰린은 일렁거리는 시야 너머로 겁에 질린 시이의 얼굴을 봤다. 이게 무슨 기묘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멈춰야만 했다.
의지는 이내 한 점으로 모이고 맞서싸울 수 없을 것만 같던 힘은 명정한 이성에 의해 급격히 물러나기 시작한다. 몸을 잔뜩 뒤로 뺀 시이에게 기어이 닿아버린 것과 르웰린이 몸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거의 동시였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 끝에 닿은 보드라운 감각이 온몸에 감전된 것처럼 퍼져나갔다. 천천히 눈을 깜빡여 제 자유를 확신한 르웰린이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지나치게 차가워졌던 몸의 온도가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르웰린은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빠르게 표정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드물게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위협적으로 다가와 손을 잡으려 들더니 혼자 진정한 걸 대체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어떤 말을 주워섬겨도 변명 같이 들릴 터였다. 초현실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병원이나 경찰서 중 한 곳에 가게될 터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이는 먼저 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르웰린이라고 불러도 되지? 사과 안 해도 돼. 네가 하려고 했던 게 아닌 거 알아."
"...무슨 의미이신가요?"
"음, 말 그대로의 의미?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거든."
며칠 전의 그였다면 아마 주변 어른에게 알려 병원의 도움을 받게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아니면 앞으로 영영 마주하지 않아야겠다 결심하거나. 하지만 이제 초현실적인 현상의 존재를 인정하든, 그의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하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리고 르웰린은 자신의 정신과 판단력을 믿었다.
"이 현상에 대해 무언가 아시는 게 있나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해."
"저에게 알려 주실 수도 있나요? "
시이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아마 선뜻 알려주기 난감한 내용일거라 짐작하면서도 그는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첫째로 이런 일에 휘말렸는데도 아무것도 모른 채 무방비하게 있을 수는 없었고, 둘째로 그는 의문점을 덮어두고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미 엮여버린 이상 무지한 채 있을 수 없다는 말에 결국 넘어간 시이는 르웰린과 약속을 잡았다. 얼마전 쓰러져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도 파리한 얼굴에 고민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것을 부러 모른척한 르웰린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시이와의 약속을 기다렸다. 어쩌면 신경을 돌릴만한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알터와 관련 없는 새로운 자극 말이다.
"알터의 유령이요?"
"응. 지금도 옆에 있어."
그렇게 말하는 시이의 얼굴은 지나치게 행복해보이고, 또 설렘이 가득했다. 그건 다만 알터가 ‘지금’도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알터의 영혼인지 아닌지 모를 것이 바로 며칠 전 그의 몸에 빙의해 사건이 벌어질 뻔했음에도 말이다. 시이가 쓰러졌을 때 그를 이끈 것을 보아 원래 알터의 성격도 남아있고, 시이가 알터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확신하니 믿어주기야 하겠지만 르웰린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이것이 과연 안전하고 정상적인 상황이 맞는가?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존재는 정말 알터인가? 시이는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맞는가? 그들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시이가 최근 겪었을 일들을 미루어볼 때 썩 신뢰가 가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겪는 반응은 부정인 법이니까.
“어떻게 알터라고 확신하시는거죠? 알터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고 단언하실 수 있나요?”
“그야, 알터랑 나만 알 수 있는 것들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
“따로 확인을 거치신 건가요?”
갑작스러운 상실에 눈이 흐려졌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돌아온 긍정이 의외라면 의외였을까. 르웰린은 미지의 존재가 정말 알터인가 하는 의문은 잠시 밀어두기로 했다. 진실의 여부를 떠나서 저정도로 믿고 있다면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했다. 르웰린이 반박을 멈추자 시이는 안심한듯 활짝 웃었다. 불과 며칠 전의 파리한 인상은 간데없고 푸르른 생기가 그 자리를 가득 채웠다. 있잖아, 알터는 어떤 친구였어? 나는 사귄지 얼마 안됐으니까. 사실 모르는 점도 많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거든. 조잘조잘 떠드는 시이를 보며 그는 무심코 생각했다. 아낌없이 퍼부어지는 선연한 애정과 부서질듯한 연약함. 역설적이게도 어떤 모습으로든 언제까지나 그곳에 있어줄 것 같은 강인함. 어쩌면 알터는 이런 모습 때문에 시이와 사귀기로 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결국은 죽어서도 곁을 맴돌며 갈구할만큼 시이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서 르웰린은 잠시간 시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 불안정하고 위험해보이는 상황에 처한 사람을 방치할 수 없다는 도의적인 이유가 하나, 친구의 연인이었다는 이유가 또 하나, 시이라는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흥미가 또 하나였다.
"유익한 만남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의문점도 어느 정도 해소됐고요."
"나도, 오랜만에 알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런가요? 그럼 다음에도 또 만나시겠어요? 저도 지금의 현상이 꽤 흥미롭거든요. 더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시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불어온 카페의 문을 타고 넘어온 산들바람은 우연이었을까. 단지 그의 기분 탓이었을까. 아니면 제 연인을 걱정하고 있을 알터가 긍정의 의미로 만들어낸 이상 현상이었을까. 르웰린은 영원히 그 답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몇 번의 만남을 넘어 종종 시간이 나면 함께 다니는 사이로 발전한 이유 역시도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시이님, 내일 숙제는 다 하셨나요?"
"거의 다 했을걸?"
슬그머니 눈을 피한 시이가 조그맣게 아마도라는 말을 덧붙였다. 꾸물꾸물 팔을 뻗어 가린 노트는 역시나 비어있어 르웰린의 한숨이 늘어갔다. 시이가 처음부터 공부가 뒷전이거나 숙제 같은 걸 신경쓰지 않는 부류의 학생이었다면 상관 없었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에게 있으니까. 그런 자질구레한 것까지 간섭하지 않는 것은 르웰린이 긋고 다니는 선이었다. 그러나 시이 리리아가 지금 학업에 소홀하는 건 전적으로 건강탓이다. 르웰린은 시이에게 숙제와 필기를 빌려주며 의례적인 잔소리 몇 마디를 하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알터가 그를 통해 시이에게 닿으려 할 뿐만 아니라 시이의 몸도 차지하려 들고있으며, 그 시도가 시이의 건강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알아채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르웰린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곁에 붙어있는 알터인지 아닌지 모를 존재는 지나치게 위험했다.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홀로 책상에 앉아 중얼거리자 연필이 저 혼자 일어서더니 연습장 위에 삐뚤빼뚤한 원을 그렸다. 따라오라는 몇 가지 신호를 던지긴 했으나 정말로 따라온 미지의 존재에 르웰린이 손을 깍지끼며 턱에 가져다 댔다.
"당신은 위험합니다. 저를 조종해 시이님께 닿으려 하는 건 둘째치더라도 시이님께 직접 빙의하는 건 확실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죠."
[제 의지로는 떨어질 수 없었어요.]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쓴 것도 아니고 발으로 쓴 것 같은 글씨지만, 어쨌든 의미는 훌륭히 전달됐다. 르웰린은 문장의 마지막 부분을 톡톡 두들기다 입을 열었다.
"본인의 위험성도 인지하고 있고, 떨어지려는 시도도 해봤군요."
[시이님이 위험하시잖아요. 르웰린에게도 폐를 끼치고 있고요.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시이님을 해치고 말거니까요.]
예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 오랜만에 기대하고 예상했던 답을 받아든 르웰린이 옅게 웃었다. 정말 알터 씨인가 보군요.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가볍게 던져진 말에 노트 위에서 춤추던 연필이 삐끗하며 잘못된 선을 그었다가 다급하게 다음 문장을 이어썼다.
[여태까지는 나인 걸 안 믿은 거야?]
"저는 나름의 논리가 있는 거지, 아무런 증거 없이 그럴듯해보이는 걸 마음가는 대로 믿는 게 아닙니다. 가끔 시이님을 돕는다는 사실과 시이님의 말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는 법이죠."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허둥대고 있을 것이다.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연필을 지켜보던 르웰린은 이내 쓰여지는 문장에 집중했다. 어떤 원리로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알터의 글씨체와 비교해도 엄청난 악필이라 알아보는데 다소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이제는 믿나요, 르웰린?]
"물론이죠. 방금 마지막 검증이 끝났으니까요. 그리 유쾌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갑네요."
[저도요. 다시 르웰린과 대화할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요. 이건 옳지 않으니까요. 적어도 그런 말을 적어내리는 알터는 그가 아는 알터였다. 그리고 르웰린 역시 알터의 말에 동의했다. 그가 인정한 친구는 기적적으로 세상에 발붙이고 있을 수 있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순리대로 사라져야 했다. 한 번도 검색할 것이라 상상해본적 없는 영혼에 관한 지식 따위를 검색해보던 르웰린은 결국 여러 가지 성불 방법을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이런 방법이 통할까요?"
[뭐든 해 봐야죠. 하나씩 시도해 봐요.]
"시이님의 협조도 필요한 건 아시는 거겠죠."
알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설득해야죠. 그렇게 적히는 글씨에 유난히 힘이 없었다. 그러나 해야하는 일을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머리를 맞대고 설득력 있고 실행가능한 성불 방법들을 조사해서 추려낸 두 사람은 자못 비장하게 시이를 찾아갔다. 정확히 말하면 비장한 건 알터였고, 르웰린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냉정한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언제나처럼 반갑게 르웰린을 맞이하려던 시이가 낯선 분위기를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었어, 르웰린?"
"알터와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서요."
옅은 긴장감이 흘렀다. 사실 알터가 말하게 두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르웰린이 생각하기에 그는 이런 냉정한 말을 하기 적당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알터에게 본인이 위협이 될지 모르니 사라지겠다 말하게 두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에게도 동정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알터를 성불시켜야 합니다."
"뭐?"
"이대로 계속 둘 수는 없다는 것, 아시잖아요?"
간신히 볕이 들었던 얼굴에 다시금 절망이 어린다. 그가 자처한 역할이었음에도 입맛이 썼다. 이쪽이 옳은 판단이고 합리적인 판단인데도. 언제나처럼 그것을 단조롭게 전한 것 뿐인데. 타인에게 찾아든 절망이 이토록 보기 싫었던 적이 있을까? 아마 없었던 것 같다. 르웰린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가볍게 다잡았다. 사람은 때로 절망을 밟고 나아가야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는 현실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위해 거짓된 세계를 지어주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알터 스스로도 원하는 일이에요."
진실의 잣대는 가혹하게 들이밀어 진다. 지금 들이닥치는 위협, 그들에게 미치는 악영향. 알터의 비정상적인 상황. 그것이 알터에게 좋지 않은 이유. 알터가 성불해야 하는 이유는 끝없이 쌓이기만 한다. 시이의 감정을 기민하게 눈치채는만큼 곧잘 배려해주던 르웰린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시이에게 현실을 직시시키는 것이 그가 해야하는 일이었고, 한 번 결정했다면 물러서지 않아야했다. 결국 때늦은 부정과 분노, 협상, 우울의 단계를 차례로 밟은 시이가 끝내 수용의 단계에 들어섰다. 물기어린 푸른색 눈동자는 알터가 있을 허공 어딘가를 향한다. 내내 시이를 똑바로 바라보던 르웰린이 처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극적인 연인의 한가운데 악역을 자처하며 서있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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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나의 자극, 나의 도파민, 나의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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