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웰시이] 해리포터 AU- 연화님

연화님 (@End_And_00)
 
 
크리스마스 연휴의 호그와트는 평소보다 조용하다. 대부분의 학생은 집으로 돌아갔으니 남은 건특별한 사정이 있는 아이들, 그들만의 연휴를 즐기려고 작당한 아이들, 그리고 O.W.L.과 N.E.W.T에 고통받는 5학년과 7학년 대다수 뿐이었다. 르웰린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집에 돌아가기 번거로웠던 쪽이었으나 시이는 마지막 부류에 속했다. 사실 시이의 실력이라면 O.W.L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테지만, 언제나 당사자가 느끼기에는 다른 법이다. 또 하나의 깃펜을 망가뜨리고 괴로워하는 시이를 본 르웰린이 우연을 가장하며 다가가 그의 앞에 앉았다.
“여기 계셨군요.”
“으으, 르웰린 왔어? 나 큰일난 것 같아. 나 사실 바보인 게 아닐까? 확실히 알 것 같은 게 하나도 없어.”
르웰린은 시이의 앞에 놓여진 책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저건 O.W.L보다는 N.E.W.T 과정에 가까운 책들이었다. 완벽히 이해가 안 갈 만도 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책 세 권을 동시에 펴고 양피지를 당긴 시이가 깃펜이 고장났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가방을 뒤적였다. 깃펜도 하나 남았네. 새로 사야겠는데? 왜 지금까지 몰랐지? 시이의 혼잣말에 르웰린은 모른척을 했다. 지금까지 깃펜이 떨어질 때쯤이면 그가 자신의 것과 함께 주문해줄지 물어봤다는 걸 시이가 눈치챌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일부러 다 떨어질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알아도 상관은 없었다. 왜 이번에는 내 깃펜이 떨어질 때까지 안 말해줬어 같은 건 그냥 들어도 이상한 말이었으니까.
“며칠 뒤가 호그스미드 방문일이니 그때 사면 될 거에요. 같이 가드릴까요? 저도 깃펜이 떨어져가거든요.”
“하지만 공부해야하는데. 그래, 공부해야지. 그냥 부엉이 우편으로 주문할래. 르웰린 것도 같이 해줄까?”
“저는 쓰던 깃펜이 마음에 안들어서 다른 깃펜을 찾아볼까 해서요. 자동 철자 수정 기능에 오류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아요. 시이님도 쓰시던 깃펜 너무 빨리 닳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이참에 신상 깃펜을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죠. 어차피 그날 크리스마스인데 하루쯤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쉬어야 능률도 오르는 법이니까요.”
시이는 조금 솔깃한 기색이었다. 불안감에 열심히 하고 있긴 하지만 산더미 같은 책더미에 파묻혀 건 절대 기분 좋은 일상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도 떳떳한 이유로 나갈 수 있는 기회는 꽤 소중했다. 간식도 떨어져 갈텐데요? 허니듀크도 들렀다가 오죠. 그 말에 시이는 항복했다. 확실히 O.W.L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간식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나도 4학년 할래. 5학년은 진짜 최악의 학년이야.”
“7학년이 되면 감상이 달라지실걸요?”
그것도 그래. 시험 같은 건 다 사라지면 좋겠어. 울상을 한 시이는 양피지에 쓰던 문장을 끝맺었다. 진심으로 하기 싫었는지 글자가 아래로 갈수록 자유분방해지고 있었다. 맨 위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영국 마법부가 설립될 당시의 정세라는 글자를 확인한 르웰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무리 봐도 그건 마법의 역사 과제였다. 르웰린은 그 사실을 알려주기에 앞서 잠시 옆에 내려두었던 책을 챙겨들었다. 크리스마스에 나가려면 그만큼 할 일이 늘어날 테니 이만 비켜주는 게 맞기도 했다.
“토요일 날 점심 시간 끝나고 한 시쯤 정문 앞에서 봬요.”
“응, 그때 봐 르웰린.”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아벨린 교수님의 과제는 글씨를 신경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점점 책상과 한 몸이 되어가는 것도 모자라 고개만 들어 인사를 건넸던 시이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다시 확인한 양피지를 가득 채운 글씨는 중간부터 괴발개발이었다. 카즈윈 교수님이나 피네 교수님, 하다못해 톨비쉬 교수님이라도 그냥 내겠지만 아벨린 교수님은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저절로 떠오르는 엄격하고 긴 잔소리에 시이의 얼굴이 좌절으로 물들었다. 이건 다시 쓰는 게 맞았다. 침울하게 수정용 깃펜을 드는 시이를 확인한 르웰린이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다 연회장을 나섰다. 확실히 시이에게는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크리스마스, 르웰린은 핼쑥해진 시이를 만날 수 있었다. 과제, 공부, 과제, 공부, 과제, 공부! 차라리 드래곤과 싸우는 게 낫겠다 투덜거린 시이는 호그스미드까지 가는 내내 눈코뜰새 없이 쏟아지던 일에 대해 시시콜콜 털어놓았다.
“과제도 과제인데, 반장 일도 문제야. 그리핀도르 점수가 늘 낮던 이유가 있었어. 내가 직접 잡으러 다녀보니까 알겠던데. 진짜 일이 터지면 그리핀도르인지부터 확인하게 되더라니까.”
“그런 성격의 아이들을 모아뒀으니까요. 분산시키는 쪽이 사고 방지에는 나을텐데, 전통이니 아무래도 어렵겠죠.”
적당히 답해준 르웰린은 스크리벤샤프트 깃펜 가게의 문을 연 뒤 시이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익숙하게 르웰린이 열어준 문을 지나간 시이는 축축 늘어지는 걸음으로 형형색색의 깃펜 진열대로 다가갔다. 저대로 두면 적당히 예쁘기만한 깃펜을 고를 것이 뻔해서 르웰린은 서둘러 시이를 따라갔다.
“거긴 깃펜을 모으는 사람들 용이에요. 필기는 맨 윗줄에 진열된 게 나을겁니다.”
“그래? 역시 난 봐도 모르겠어.”
“제가 골라드리죠. 튼튼한 게 좋으세요, 기능이 많은 게 좋으세요?”
카테고리를 좁히는 건 금방이었다. 르웰린은 튼튼하고 오탈자를 표시해주는 깃펜 중 시이를 닮은크림색 깃털이 달린 걸 찾아내 내밀었다. 이게 괜찮을 것 같네요. 시이님과 어울리기도 하고요. 예쁜 깃펜을 구경하며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은 시이는 르웰린이 내민 깃펜을 들고 이리저리 써보더니 말갛게 웃었다.
“고마워, 르웰린. 이걸로 해야겠다. 르웰린은 뭐 살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르웰린은 굳이 깃펜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시이를 호그스미드에 데리고 나올 핑계일 뿐이었으니까. 적당히 쓰던 브랜드의 최신 라인을 가리키자 시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색은 내가 골라줘도 돼? 그렇게 묻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건 어쩌면 불가항력이었다. 제법 심각한 얼굴로 깃펜을 들었다 놨다 하던 시이는 연보라색과 푸른색 깃펜 중 고민하다 전자를 골랐다. 빛에 따라 얼핏 푸르게도 빛나는 깃털이 그의 눈동자 색과도, 시이의 눈동자 색과도 닮았다고 느낀다면 너무 앞서간 걸까? 르웰린은 때이른 설렘을 익숙하게 감추고 깃펜을 받아들었다. 매번 쉽게 쓰고 버리는 깃펜이 소중해질 것도 같았다.
“우리 이제 허니듀크 가는거야?”
계산을 마치자마자 들뜬 얼굴을 한 시이는 벌써 사고싶은 간식 목록을 줄줄이 읊기 바빴다. 과하다 싶은 양이었지만 요즘 시이가 전투적으로 먹어치우는 걸 봐서 넘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게의 문을 열고 나서자 눈에 띄는 모든 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했다. 장식들이 화려하게 매달려 있는 트리와 겨우살이,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가득한 거리,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캐롤. 이제야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마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이가 가장 거대한 트리가 서있는 광장으로 달려갔다.
“맞다, 오늘 크리스마스였지?”
“네.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에요, 시이님. 선물은 허니듀크의 초콜릿으로 할까요?”
“좋아! 메리 크리스마스, 르웰린. 르웰린 선물은 뭐 주지. 역시 책인가? 서점 들렀다 갈래?”
그렇게하죠. 보일듯 말 듯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르웰린은 이번에는 시이에게 끌려가다시피 허니듀크에 도착했다. 쥐 모양 얼음과자! 꿀 색의 태피! 설탕 깃펜! 홀린 듯 과자를 쓸어담던 시이는 뒤늦게 르웰린이 계산하기로 했던 것을 기억해내고 슬쩍 몇 개를 도로 진열대 위로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르웰린이 조용히 다가가 진열대에 내려둔 과자를 다시 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과자 조금 많이 산다고 신시엘라크의 재정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럼 몇 개 더 사도 돼?”
“마음대로 하세요.”
시이는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갈레온 모양 초콜릿과 셔벗, 부풀어오르는 커피 사탕을 마저 담아 계산대로 가지고 갔다. 너무 많이 산 것 같기는 하지만 요즘 진심으로 달달한 과자가 먹고 싶었다. 책을 많이 사주면 되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한 시이는 계산이 끝나자마자 서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르웰린은 시이의 생각에 따라줄 생각이 없었다. 이미 시이가 산 과자로 양손이 가득했다. 책까지 많이 사면 들고갈 방법이 요원했다. 꿈의 신탁이라는 두껍고 학술적인 점술 책을 골라서 시이를 완벽히 기겁하게 만든 르웰린은 과자의 틈바구니에 책을 끼워넣고 금세 서점을 나섰다. 해가 슬슬 모습을 감추고 날씨가 추워지는 시간, 하늘에서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르웰린, 눈 와!”
“그러네요. 조금 기다렸다가 갈까요?”
“그래, 어차피 곧 그칠 것 같으니까 여기서 피하고 있다가 가자.”
벽에 붙어 선 시이가 손을 쭉 뻗어 눈송이 하나를 붙잡았다. 이것 봐, 르웰린. 눈 잡았어. 그렇게 말하는 시이의 머리 위에 설핏 장식된 겨우살이 나무 가지가 보였다. 겨우살이 아래의 키스가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르웰린은 홀린 듯 시이를 바라봤다. 노을 아래 내리는 눈과 겨우살이 아래 선 당신, 어렴풋이 들리는 사랑을 노래하는 캐롤. 그 모든 것이 완벽해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게 맞냐며 다시금 묻는 시이의 입술이 자꾸만 시선을 앗아가서, 부러 놀리듯 웃으며 한 발짝 다가섰다.
“시이님, 지금 겨우살이 아래에요.”
“응?”
“크리스마스에 장식을 한 겨우살이 나뭇가지 아래에 있는 상대에게는 아무나 키스할 수 있잖아요. 계속 거기 있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언제나 그렇듯 시이는 이런 장난에 면역이 없었다. 얼굴이 단숨에 타오르듯 붉어지고 순식간에 거리가 멀어진다. 딱 겨우살이 나무 바깥까지 도망간 시이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럴리가 없잖아! 겨우살이를 못 본 것 뿐이야. 누가 그런 걸 신경쓴다고! 마구 떨리는 목소리가 시이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뻔히 예상하고 의도한 상황임에도 심장 한구석이 쿵하고 울렸다. 하지만 감정이 요동칠수록 침착할 수 있는 것이 그라서, 르웰린은 양 손 가득한 짐을 고쳐쥐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농담이었어요.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으니까요. 이제 조금 나아지셨나요?”
“르웰린 너무해!”
다리를 굽히고 앉은 시이가 아직 식지 않은 뺨에 연신 손을 가져다댔다. 차가운 손의 냉기에도 홍조는 한참이나 가시지 않았다. 그런 시이를 내려다보던 르웰린은 문득 그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거부당했을지언정 그의 감정이 울렁거리는 만큼 시이의 감정도 요동을 치는 게 어쩐지 만족스러워서 괜히 짐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장난 안 칠 테니까 들어오세요. 지금 반쯤은 진눈깨비라 잘못하면 감기걸립니다.”
그렇게 말한 저의가 온전히 걱정인지는 재고해봐야할 문제겠지만, 어쨌든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새초롬한 눈으로 르웰린을 날카롭게 노려본 시이는 두 번 다시 그런 장난을 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고서야 그의 곁으로 돌아갔다. 한참이 지나 눈이 그칠 때쯤에도 르웰린을 똑바로 보지 못한 시이가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아졌어. 고마워.”
그거면 충분했다. 르웰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제 출발해도 되겠다며 앞서 걸었다. 그리핀도르 기숙사 근처까지 시이를 데려다주는 길은 어째서인지 조금 더웠다. 아무래도 그 농담에서 민망했던 게 시이 혼자는 아니던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책과 그의 몫인 깃펜만 가지고 슬리데린 기숙사에 내려온 르웰린은 깃펜 중 하나를 받침대에 꽂아 침대 옆의 협탁에 올려뒀다. 하나쯤은 기념으로 남겨둬도 되겠지. 그와 영원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몽글몽글한 기분이 그를 감싸안았다. 오늘은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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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