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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L/NOVEL [알시르] 가상현실 AU (1) - 연화님 2024. 4. 17. 00:13

(c. 연화님)

 

총의 격발음이 대지를 연달아 갈랐다. 악어를 닮은 괴수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발을 휘둘렀으나 거대한 대검에 의해 전진이 막혔다. 대검과 발톱이 서로를 긁어내리자 듣기 싫은 쇳소리가 났다. 그 잠깐의 시간, 빈 탄창을 다시 채운 르웰린은 괴수의 눈동자를 정확히 조준했다. 거대한 눈꺼풀이 제 눈동자를 잠시 감추는 순간을 충실히 기다리며 숨을 멈춘다. 괴수가 만들어내는 대지의 울림도, 초목이 부서지는 소리도 일순 멀어졌다. 파충류의 것을 충실히 재현한 길게 찢어진 노란색 눈동자가 다시금 모습을 보이는 순간 총이 발사되었다. 긴 총신을 타고 날아간 총알은 순식간에 창공을 지나 괴수의 눈을 꿰뚫는다. 총알이 목표한 바를 이루어냈음을 인지하고서야 주변의 소음이 돌아왔다. 길다란 울음소리를 끝으로 괴수가 드디어 움직임을 멈췄다.

"르웰린, 수고했어요!"

황금빛 잔해가 서서히 바스라지는 대검을 갈무리한 알터가 활짝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꽤 오래봐왔는데도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르웰린은 눈 앞에 정신없이 떠오르는 던전 클리어 관련 알림창을 정리하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람을 쉽게 사귀지 않는 그가 연 단위로 같은 파티를 유지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알터 정도의 실력을 가진 전위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으며, 게임 속에서 현실 이야기를 전혀 안 하는 사람을 찾는 건 더더욱 쉽지 않았고, 그의 뒤죽박죽인 사냥 시간에 군말 없이 맞춰주는 사람은 아예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 알터를 만난 건 꽤 행운이리라. 하지만 르웰린은 행운이란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님을 알았다. 따라서 이건 그리 달갑지 않은 소리였다.

"한 명을 더 끼우자는 말씀이신가요?"

". 한 번만 같이 다녀보고 결정하면 안될까요?"

솔직히 말하면 사람이 필요하기는 했다. 일반적으로 파티는 네 명으로 구성된다. 그와 알터가 실력으로 어떻게든 던전을 클리어해왔다지만 둘이서 모든 걸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성가신 일들을 잊고 즐기기 위해 하는 게임에서 사람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면 주객전도 아닌가. 그가 타인을 잘 대하고 이끄는 것과는 별개다. 잘한다는 게 하고싶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괜히 이상한 사람을 만나 대거리를 하는 건 사양이었다. 흐음 하고 숨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르웰린은 알터의 간절한 눈빛에 결국 항복을 표했다.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그대로 끝이라는 것을 명시한 뒤였다.

"좋아요! 정말 좋은 분이시거든요."

저 확신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르웰린은 구태여 회의적인 말을 내뱉는 대신 빠르게 약속을 정하고 게임 접속을 종료했다. 가상 현실 게임기에서 빠져나와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무수한 알림이 그를 반겼다.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현실은 게임과 같지 않아서, 그가 모든 일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했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이익을 도모하고 그 과정에 희생되는 건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 속으로.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했던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 르웰린은 동의했다. 이미 평생을 놀고먹어도 넘칠 돈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탐해 벌이는 아귀다툼 속에서 버티고 있다보면 그도 비슷한 인간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싸움에서 발을 뺄 수는 없었다. 그는 '신시엘라크'였으므로. 그 이름에 당연히 따라오는 부, 권력, 명예는 르웰린이 반드시 지켜야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아마 자부심일 것이다. 그러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짐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부담스러운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쉴 곳이 필요했다. 르웰린이 가상 현실 게임을 찾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온전한 익명의 세계. 선과 악이 분명하며 필요한 고뇌라고는 어떻게 괴물을 무찌를 것인가 뿐인 명료한 세상. 그곳에서는 누구도 그가 신시엘라크라는 사실을 몰랐다. 실수를 한다고 해서 수십수백 명의 일자리가 왔다갔다 하지 않았고, 가문의 이름이 뉴스에 오르내리지도 않았다. 게임에서의 실수가 초래하는 일이란 최악의 경우 던전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정도였다. 그랬다. 알터가 이상한 사람을 데리고 온다한들 던전 클리어가 조금 늦어질 뿐이다. 이상한 헛소리를 하거나 현실에 대해 캐묻는다 해도 무시하고 다시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니 미리 이리저리 재볼 필요가 없었다. 애당초 이렇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걱정하는 건 답지 않았다.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약속시간, 르웰린은 인정했다. 그가 한 건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알터, 세 시 방향!"

", 시이님."

시이는 좋은 파티원이었다. 힐러가 아닌 게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이 게임에서 힐러는 포션과 컨트롤으로 어떻게든 대체할 수 있었다. 주변을 압도하는 열기를 내뿜는 화염이 나무를 기반으로한 괴물에게 직격한다. 총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대단위의 타격이었다. 르웰린은 두세 발짝 뒤로 물러나며 새까맣게 타버린 나무 껍질 안쪽 핵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푸른 청옥을 닮은 핵의 한가운데 금이 쩍 갔다. 나뭇가지 하나를 힘겹게 막고 있던 알터가 눈을 반짝 빛내며 검의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대검의 폼멜 부분이 마지막으로 핵에 직격했다. 대지를 울리는 목소리가 패배를 원통해하며 사그라져 간다. 그들의 승리였다. 르웰린은 마지막으로 재보듯 시이를 바라봤지만 돌아온 건 신난 미소였다.

"어때? 셋이 하니까 더 낫지?"

"그렇네요. 앞으로도 종종 함께 다니시죠."

"좋아. 시간은 천천히 조율해보자."

마냥 싱글벙글 웃은 알터가 자신의 말이 맞지 않냐며 폴짝폴짝 뛰더니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시이가 따라 소리내어 웃더니 알터의 옆에 함께 주저앉았다. 그 모습이 제법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르웰린은 묘한 감상에 젖었다. '그런' 사이인가? 맞든 아니든 상관은 없다. 둘 사이의 일이 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괜찮았다. 보통 '그런' 사이는 어떻게든 불협화음을 내기 마련이지만, 글쎄. 르웰린은 알터를 믿었다. 책임감 없이 일을 만들 성격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다음층도 금방 클리어할 것 같네요. 당분간은 계속 내려갈까요? 보스방 앞에서 한 번씩 정비하고 가도록 하죠."

"나는 찬성이야. 이 정도면 두세층 정도는 금방 클리어할 걸?"

이런 쪽에는 별달리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알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시이에게 고정된 것을 보니 정말 제대로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인 건지 의심스러웠지만. 르웰린은 종종 얼빠진 모습을 보이는 자신의 파티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굳이 그가 내놓은 의견을 반대하려 입씨름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럼 다음에 뵐 시간만 정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그래. 나는 평일 오전만 아니면 괜찮아서, 최대한 르웰린에게 맞출게."

일정 조율은 순식간에 끝났다. 별다른 사담도 나누지 않고 빠르게 인사까지 끝낸 르웰린은 약간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알터가 시이님, 시이님 온종일 외치는 건 조금 피곤하지만 용인할 수 있는 범위다. 어쩌면 둘이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층까지 가볼 수도 있겠지. 그런 가벼운 감상을 늘어놓던 때가 있었다. 무언가 어긋났다고 처음으로 생각한 건, 알터를 향해 달려가는 시이를 본 순간이었다. 왜 시선을 가득 채우는 알림창 대신 시이를 봤을까. 왜 시이가 가장 먼저 본 사람이 그가 아니라 알터라는 사실이 그토록 탐탁치 않았나. 그럼에도 뒤늦게 그를 돌아본 시이의 웃음에 마주 웃고 말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일이었다. 르웰린은 이어지려는 생각을 강제로 멈췄다. 어떤 감정은 이름 붙이지 않는 편이 낫다. 감당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외면해야 했으므로.

"르웰린, 오늘도 바로 가는 거야?"

"오늘은 마을에 들러야 합니다. 포션도 떨어져가고, 무기도 내구도가 아슬아슬 하거든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건 쉬웠다. 이름 붙이지 않은 조그만 감정 하나 숨기지 못할 만큼 허술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실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 시이와 알터 사이의 거리감이 착실히 줄어들고 있는 것도, 아주 달갑지는 않았다. 그게 유치하고 치졸한 감정의 발로인지 이 파티를 되도록 무탈하게 유지하고 싶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태여 답을 찾는 게 바보 같은 짓인 건 알았다.

"마을 갈 거면 같이 가자. 난 방어구 수리 해야돼."

그의 속을 알리 없는 시이가 손을 내밀었다. 발 밑에는 벌써 텔레포트 마법진이 깔리고 있었다. 르웰린은 그의 것에 비해 턱없이 작은 손을 성큼 잡았다. 분명 0 1로 이루어진 데이터가 구현해냈을 감각이지만 어쩐지 간질거리는 온기가 느껴졌다. 같이 가자며 허둥지둥 시이의 반대쪽 손을 잡은 알터도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을까? 사람 속을 전부 읽을 수는 없지만 아마 그럴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토록 뺨이 붉어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 순간 르웰린은 제가 아주 바보같은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몇 주 간의 노력이 허망하게 무로 돌아간다. 사랑과 기침은 감출 수 없다 했던가. 실로 옳은 말이다. 처음 겪어보는 사랑이란 인상을 찌푸릴만큼 달고 끈적해서 더는 못 본 척 할 수가 없었다.

보라빛 눈동자가 날 것의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녹안을 빤히 응시했다. 아마 그는 평생토록 가지지 못할 솔직함이었다. 저 투명한 얼굴 아래서 사랑을 읽어내기란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쉬워서, 무심코 제 감정도 함께 비추어보게 만드는 것이다. 하여 뻔하게도 사랑이었다. 그는 시이를 좋아하고 있다. 알터에게 빼어난 눈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때마침 텔레포트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며 기묘한 부유감이 찾아온 것도. 시야가 검은 장막에 가리워졌다가 천천히 구성되는 세계를 담는다. 마을 이름이 시야 한가운데 거대하게 떠오르며 이곳이 가상 현실 세계임을 다시금 일깨웠다. 그러니 르웰린 신시엘라크는 진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어떤 사람과 사랑에 뻐지고만 것이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내내 외면해왔다고 한들 그것이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어서, 사실 르웰린은 내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만나던 순간 그를 말갛게 올려다보던 푸른 눈동자, 흘러넘치던 생기, 그가 현실에 대한 주제를 바꾸려 들기도 전에 먼저 피해주던 친절, 전멸 직전에도 탈출구를 찾던 끈기와 결국 방법을 찾아내고말던 번뜩임. 그래, 시이를 사랑할 이유는 그다지도 많았다. 누군가는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랑하게 되었냐 물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의아했다. 사람의 이성과 합리를 앗아갈 감정이라면 마땅히 지금보다는 강렬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사랑에 어떤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설명할 수 없어서 사랑이다. 사랑은 불가해한 것이다.

그러나 르웰린이 마주한 불가해에 압도당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의 사랑은 이제 막 싹을 틔운 참이고,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가 살아보며 기꺼이 곁에 있으라 허락한 몇 안되는 친구였으며,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시이의 애정은 명백히 알터를 향해 기울어있었다. 설명을 붙이다보면 감정을 이성의 영역에 밀어넣을 수 있다. 그렇게 그의 사랑은 어딘가 숨겨두기 좋은 모양으로 다듬어져 가끔 그가 여유로울 때 먼지를 닦고 구경할만한 추억거리가 되는 것이다. 르웰린은 텔레포트를 위해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하얗고 따뜻한 손이 멀어져간다. 더 잡고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괜스레 아쉽다. 얕은 감상을 능숙하게 감추며 시이가 가야한다던 방어구 상인에게 먼저 들렸다. 시이는 늘상 짓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방어구를 맡기며 다음 던전 공략에 필요한 방어구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었다. 어느새 끼어든 알터가 요령좋게 시이에 대한 찬양을 끼워넣으며 대화에 합류했다. 신중하게 특수처리된 장갑을 들어올린 시이가 멀뚱히 서있던 르월린을 잊지 않고 불렀다.

"르웰린, 다음 층부터는 방어구 바꿔야 될 것 같아. 이참에 얼음 속성 저항도 붙일까? 한동안 유용해 보여."

"글쎄요. 알터 씨는 전위에 서야하니 확실히 필요하겠지만, 저희는 불 속성 데미지 추가가 낫지 않을까요?''

"그런가?"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중얼거린 시이가 조금 실망한 기색으로 장갑을 내려놓았다. 옆에서 알터가 선물할지 그냥 있을지 고민하는 기색으로 장갑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또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르웰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장갑은 나무 귀신과 용암 임프를 잡아서 37층 장인에게 제작을 맡기면 만들어 주는 방어구입니다. 마음에 드시면 거기 제작을 맡겨서 불 속성 데미지 추가로 만들어 달라고 하세요."

뒤늦게 같은 모양의 장갑을 어디서 봤는지 깨달은 알터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이런 구도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못난 뿌듯함이 르웰린을 휩쓸었다. 유치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신시엘라크답게 행동해야지. 게임할 때면 잠시 잊고 있던 생각이 자연스레 그의 행동을 교정한다. 소위 아이 같은 생각들은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더이상 수면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괜찮으시다면 제 방어구와 같이 의뢰해두죠. 저도 방어구를 바꾸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정말? 그럼 부탁 할게. 이거 진짜 마음에 들거든."

갑옷이나 부츠는 아직 쓸만하다며 가게를 나선 시이는 이번에는 그의 무기를 수리하러 가자며 앞장섰다. 확실히 기분이 좋은 건지 이리저리 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르웰린은 무기점에서 무기를 수리하고 포션 상점에서 포션을 보충하는 내내 그의 정신이 아까 본 장갑에 가 있음을 느꼈다. 늘 정시에 게임을 종료하던 그의 규칙이 처음으로 깨졌다. 37층에 들러서 장갑을 의뢰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 약속이 있기까지 일주일. 그는 일주일이 그토록 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시이님, 말씀하셨던 장갑입니다."

"벌써?"

"마침 재료가 있었거든요. 그날 바로 의뢰했습니다."

거래소에 붙박혀서 재료를 사들인 건 그만의 비밀이었다. 르웰린은 얼마였냐는 시이의 질문에 손을 내저어 사양을 표한 뒤 던전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시이의 마법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점점이 붉은 불꽃이 나부낀다. 온통 하얗고 푸른 시이에게 남은 그의 흔적이 기꺼웠다. 바닥에 깔린 얼음과 불꽃이 맞닿아 뿌연 안개로 가득찬 공동 속에서 우뚝 선 르웰린이 가만히 숨을 가다듬었다. 가늠쇠 너머의 목표물이 이리저리 일렁였지만 맞추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기면 귀가 먹먹해지는 폭발음이 울린다. 뱀을 닮은 괴물이 몸을 뒤틀며 비명을 내지르고, 총알이 지나간 자리 위로 시이가 생성해낸 화염이 쏟아져 내렸다.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알림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옆에 있던 시이가 그를 끌어안았다. 멀리 있던 알터에게도 손을 뻗는 게 보였지만, 지금만큼은 거슬리지 않았다. 뻗어진 하얀 손에 반장갑 형식의 하늘하늘한 장신구가 걸쳐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르웰린은 처음으로 던전의 클리어가 늦어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된다면 저 장갑은 오래오래 유용해지지 않겠는가.

 

후편:

https://allshilly.tistory.com/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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