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시르] 가상현실 AU (2) - 연화님

(c. 연화님)

 

전편: https://allshilly.tistory.com/158

[알시르] 가상현실 AU - 1

 

크림색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다정함이 깃든 푸른 눈을 보았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소녀는 완드를 가볍게 휘둘러 보더니 해사하게 웃었다. 물결치듯 재배열된 마나가 눈길을 이끄는 빛무리로 화해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시끌벅적한 상점가의 뒷골목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알터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까맣게 죽은 녹안에 춤추는 빛이 섞여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한없이 우울하던 기분 탓이었을까? 기초적인 수준의 빛 마법이 유난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제 막 던전 탐험을 시작한 건지, 빛 마법에 둘러싸인 모험가는 상인과 재잘재잘 무언가를 떠들더니 허름한 장비를 하나씩 갖춰나갔다. 꼭 알터가 처음 던전에 발을 들였던 날처럼 어설픈 태가 나는 차림이었으나 그곳에는 온전한 생기가 있다. 그러니 처음 본 모험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시이? 멋진 이름이군. 즐거운 모험을 하게나."

험상궂게 생긴 대장간의 주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언제나와 같은 인사말을 던진다. 여태껏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 박힌 건 오직 모험가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시이. 모난 곳 없이 예쁜 단어가 혀 끝에 부드럽게 굴러갔다. 의식할 새도 없이 소리가 된 이름은 한숨처럼 흩어진다. 오랜만에 말을 해서인지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졌다. 한 박자 늦게 자신이 시이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알터는 제풀에 놀라 허둥지둥 주변을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녹색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잠시 시선에서 놓친 시이를 다시 찾는 일은 놀라울만큼 쉬웠다. 이 거리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연금술사 협회가 분명 이쪽이라고 했는데."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시이가 그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알터는 도망이라도 치듯 좁혀진 거리만큼 뒤로 물러났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 다만, 감히 다가설 수 없었다. 그것이 딱히 그를 의식해 내디뎌진 걸음이 아니더라도 그러했다. 여전히 알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시이가 주변과 지도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얼굴을 환하게 폈다. 목적지를 찾은 모양이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상이 함께 환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온통 흑백이던 세상에 시이라는 색채가 한 방울 톡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온통 절망 뿐이던 마음에 옅은 파문이 인다. 알터는 시이가 사람들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고정했다가 뺨의 눈물자국을 문질러 지웠다. 시이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졌다.

소식을 좇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던전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모험가에 대해 떠들어대기 때문이다. 마법사 조합 역시 오랜만에 훌륭한 마법사가 나왔다며 시끌시끌 했다. 마법은 쓸 줄도 모르면서 마법사 조합과 마법용품 상점을 배회하는 건 알터의 일과가 되었다. 시이가 던전의 제 1구역으로 분류되는 5층을 클리어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는 몇 달만에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1구역을 클리어하다 스승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솜씨였다. 그제서야 알터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스승에 대해 떠올린다. 과거의 기억을 잃은 채 상점가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있던 그를 알반 길드라는 곳에 데려가고, 보살펴준 분이셨다. 검을 드는 법, 살아남는 법,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 모두 그분에게서 배웠다.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종종 하는 길드원들 사이에서 겉돌면서도 외로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부 그분 덕이었다. 언젠가 은혜를 갚고자 했다. 그걸 위해 던전에 발을 들였다. 길드원들은 모두 던전의 끝을 보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으며 그의 스승 역시 그러했으므로. 무언가 보탬이 되고자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알터, 포기하면 안된다. 끝까지 집중해."

절박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내리친다. 알터는 부상을 입은 채 무기력하게 웅크려 있는 스스로를 보았다. 움직여. 네 할 일을 해. 아니면 적어도 도망치기라도 해. 아무리 소리쳐도 저와 같은 얼굴을 한 아이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기만 할 뿐이었다. 공격이, 항거할 수 없는 공격이 아이에게로 향한다. 알반 길드의 상징이 새겨진 로브가 눈 앞을 가득 채웠다. 그 때 느낀 감정이 안도감이라는 사실을 저주했다.

"너는 할 수 있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검을 들어."

핏기가 가신 손으로 검을 들었다. 괴물에게 스친 발목이 욱신거렸지만 일어섰다. 배운대로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자세를 잡고 대검으로 괴물의 복부를 꿰뚫는다. 알터가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스승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았다. 그의 마나가 제어에서 벗어나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어느새 시야가 흐려졌다.

"그만두세요. 멈춰. 멈추란 말이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순간이 오면 발버둥치게 된다. 눈물이 흩날리며 잠시 눈 앞이 맑아졌다. 일순 선명해진 광경은 잔혹한 진실이 되어 그를 꿰뚫었다. 알터의 스승은 그의 마나 폭발을 제어하려다 죽음을 맞이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만약이 산발적으로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어떤 가정도 현실이 되지 못 한 채 스러지고 엄정한 진실만이 붉은 피와 함께 남았다. 하여 알터는 생각하고 만다. 그가 시이처럼 마나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았다면. 아니, 하다못해 여느 모험가만큼이라도 똑바로 다룰 수 있었다면 그의 스승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기꺼이 사고라 불러주었으나 그의 죄가 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끝없이 침잠해가던 알터의 생각은 시이의 이야기를 하며 친해진 마법사 조합 사무원에 의해 끝이 났다.

"어이, 알터. 저길 봐. 네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모험가야."

마법서가 보관된 방에서 나와 수련장 한가운데 선 시이가 차분한 숨을 뱉었다. 주변의 마나가 시이의 부름에 공명해 모여들어 질서를 이룬다. 화염이 물결치며 뻗어나가 창으로 화하더니 정확히 허수아비를 꿰뚫고 사라졌다. 알터는 시이를 처음 본 그날처럼 홀린 듯 일련의 과정에 시선을 집중했다. 정제된 불길 위로 일렁이던 빛의 구체가 덧씌워졌다. 골목에서 울다 시이를 처음 마주한 그날은,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마나의 흐름이 아름답다 생각한 날이었다. 마나란 주인을 닮아갈 수밖에 없으니 시이에게 시선이 간 건 당연한 이치였다. 다정하지만 굳건하며 강하다. 그런 당신의 발자취를 알고 싶었다. 나약하기만 한 나와는 다른 당신의 삶을 좇아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좋으면 말이라도 걸어보는 게 어떠냐."

사무원의 말에 알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습관적으로 가지고 다녔으나 뽑지는 않았던 검자루를 매만졌다. 서늘한 감촉이 한없이 가라앉아 가는 정신을 일깨웠다. 다시 검을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다 보면 던전 탐험에도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중간에 무너지더라도 괜찮았다. 시이를 보고 있으면 몇 번이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알터는 그날부터 알반 길드의 수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상관 없었다. 힘들 때면 마법사 조합으로 달려갔다. 시이가 있는 날에는 멀리서 하염없이 구경했고, 없는 날이면 사람들이 들려주는 시이의 모험담을 들었다. 그러고 나면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겼다. 시이는 마치 환하게 빛나는 별처럼 그의 앞을 질주했다. 점점 던전의 최전방에서 활약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내 45층 최초 클리어라는 업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살을 에는 추위였다. 검이 잘 들지 않는 두꺼운 가죽을 지닌 예티가 덩치에 맞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그를 위협했다. 무리하게 공격을 시도하다 발목을 삔 게 문제였다. 발목이 욱신거리며 순간 중심을 잃었다. 거짓말처럼 알반 길드의 상징이 새겨진 로브가 펄럭거린다. 짧게 사과하고 뒤로 빠져서 응급처지를 한 뒤 되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저를 막아선 알반 길드의 상징이 자꾸만 스승을 연상시켜서, 다른 모든 생각은 그저 하얗게 변해버린다. 마나를 통제해야한다는 어렴풋한 강박만이 몸을 움직였다. 그의 하잘 것 없고, 너저분한 마나가 둔중하게 움직이며 그를 둘러싼다. 알터가 할 수 있는 건 마나의 예기를 자신에게로 바짝 세운 채 덜덜 떠는 일 뿐이었다. 하여 전위를 잃은 파티는 거대한 출혈을 감수한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또 그의 탓이었다. 한 길드원은 그대로 던전 탐험을 그만뒀다. 벌써 두 사람의 미래를 잡아먹은 그가 계속 던전에 발을 디뎌도 좋은가. 알터의 고민이 길어짐에 따라 나머지 두 파티원 역시 새로운 파티를 찾았다. 그렇게 홀로 남은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이 시이였다.

시이에 대한 소문을 듣기 위해서라도 알터는 새로운 오늘을 살아갔다. 그의 두 번째 죄였던 45층이 하필 시이에 의해 최초로 클리어 되었다는 소식은 마치 한 번 더 던전에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과 같았다. 같이 던전에 들어갈 파티원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르웰린. 우연히 만난 소년은 자초지종을 듣고서도 파티를 승낙했다. 다른 길드원들이 으레 하는 로그오프니 현실이니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말도 하지 않았다. 사무적이고 대하기 어려운 면이 있긴 했지만 그런 게 중요할 리 없었다. 새로운 동료를 최선을 다해 지킬 뿐이다. 그러면 언젠가 시이를 마주할 용기가 날 것도 같았다. 파티 인원이 둘 밖에 안 되는 터라 던전의 극초반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천천히 다시 나아가고 있다 생각하면 괜찮았다. 그가 한 발, 한 발 삶을 향해 돌아가는 동안 시이는 반짝이는 새벽별처럼 가장 앞서 던전의 빛을 밝혔다. 사람들을 구하고, 괴물들을 처치했으며, 던전 완전 클리어라는 미래를 이끌었다. 사람들은 이제 시이를 영웅이라 불렀다. 시이가 밝게 빛날수록 그의 희망은 점점 거대해져서 이제는 다만 시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모든 좌절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점가에서 시이의 이야기가 줄어들다가 결국 끊기고, 시이의 모습마저 볼 수 없을 때도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음을 잃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리고 알터가 처음으로 간절하게 붙잡은 희망은 그의 믿음에 보답했다. 정확히 45층을 클리어 하던 날, 다소 떨떠름해 보이는 르웰린을 붙잡고 빙글빙글 돌며 마음껏 기뻐하다 언제나처럼 마법사 조합에 들르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시이님! 어... 그... 그러니까... 제가... 예전부터 쭈욱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악수 한 번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

멀리서 줄곧 보아왔던 푸른색 눈동자가 깜빡인다. 동경하고야 말았던 다정한 마나가 부드럽게 공기를 풀어내렸다. 소식이 끊겼던 기간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전만큼 굳건하지도 강하지도 못했지만 알터는 믿었다. 시이는 결국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터였다. 아직 깎여나가지 않은, 그래서 앞으로 무엇도 꺽을 수 없을 다정함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하여 알터는 시이를 돕고 싶었다.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던 과거와 달리 한 걸음 뒤에서나마 시이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걸 위한 시간들이었다. 조금 당황하는가 했던 시이는 그의 끈질긴 시도에 곁을 내어주고 만다. 알터가 친하게 지내던 몇몇은 드디어 '그' 모험가를 만난거냐며, 소문과 실제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충고를 했다. 놀림 반 걱정 반의 충고였다. 그리고 알터는 거의 처음으로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시이는, 그가 직접 만난 희망은, 결코 상상보다 못하지 않았다. 마법사 조합 건물 어딘가에 앉아 잠시 대화만 나누어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물약상점의 마누스 씨가 36층에서 나는 약초를 캐줄 수 있냐고 부탁하셨거든."

사람을 안심시키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알터는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눈앞의 시이는 실재했지만. 품이 남는 하얀 옷이 시이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움직인다. 알터는 잠시 거기 시선을 빼앗겼다가 시이와 눈을 마주쳤다. 푸른 눈동자가 슬쩍 알터를 피해 굴러갔다.

"알터도 같이 갈래? 너무 오랜만이라 파티원도 없고... 혼자는 무리일 것 같거든."

문장 하나가 끝날때마다 습관적으로 끄덕여지던 고개가 뒤늦게 멈췄다. 머리를 가득 채우던 포근하고 들뜬 생각들이 풍선이 우르르 터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건, 함께 파티를 하자는 제의였다. 당연히 일시적이겠지만. 어쨌든 제안은 제안이었다. 제안일 것이다. 머리의 생각이 뒤죽박죽 엉킨다. 두려움이 잠시 심장을 두드렸지만 이내 거대한 기쁨에 휘말려 감정의 저편으로 가라앉는다. 영광이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상실이 스쳐갔지만 시이는 영웅 아닌가. 어떤 시련에서도 굳건히 돌아올테니 그와 얽힌다 한들 무너질리 없었다. 잠깐의 행운으로 여겨졌던 파티는 시이의 주도로 계속 이어졌고, 알터는 제 마지막 용기를 끌어내서 르웰린과의 파티에 시이를 합류시켰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창이 뜨기 전까지는.

"괜찮아, 알터? 내 말 들려?"

시이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들어올린 손의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노이즈라도 낀 듯한 시야에 붉은 글자만이 선명했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