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시르] 교환 일기는 로맨스를 타고 - 이사리 님

c. 이사리
 

인제 와서 말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한데 날짜 같은 거, 안 적어도 괜찮지 않아? 어차피 우리 셋이 돌려 쓰는 교환 일기고 옆에서 뻔히 보고 있는데 날짜 같은 거 적는 것도 우습잖아. 봐. 제이도 옆에서 그건 맞는 말이라고 하잖아. 메이플, 네가 원칙주의자이고 뭐든지 적당히 하는 법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는데 1년을 넘게 썼으면 좀 봐줘. 아니, 잠깐…!

1년을 넘게 쓰고 옆에 같이 있다고 해도 날짜를 기록하는 건 네 생각보다 더 중요해, 베티. 이 일기장은 우리의 추억이 될 거고 시간이 꽤 지나면 언제 기록했는지도 잊어버리겠지. 날짜라도 적어둬야 이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않겠어? …물론 너나 제이가 불편하다고 하면 참아는 볼게. 네 말대로 이건 우리 셋의 일기장이고 내 고집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메이플, 그렇게 토라진 표정으로 말해봤자 설득력이 전혀 없거든~.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고 오늘은 뭐 재미있는 거 듣거나 보지 못했어? 예를 들어서…….

시이 님과 다른 두 분의 이야기라던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제이. 내 옆구리는 네 전용이 아니니까 그만 좀 찔러줄래?! 그것보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 왜 일기를 써야 하는 건데! …아니, 메이플. 내 말은 일기가 쓰기 싫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애초에 이건 일기보다 난잡한 낙서에 가깝…. 알았어, 알았다고! 쓰면 되잖아! 나 참, 이래 놓고 일기장 같은 건 의미가 없다거나 우리 우정은 졸업 후에 끝이라고 말하기만 해봐. 다 엎어버릴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베티, 너도 꽤 성실하다니까. 그래서 오늘은 시이 님과 두 사람이 어땠는데? 난 그 셋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가장 좋더라~.

밀레시안 님의 이야기를 단순한 유흥거리로 삼지 마, 제이. 그분은 정말 칭송받아 마땅하고 그 업적을 이루기 위해 치른 희생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테니까. …물론 그걸 잊고 배척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유흥거리가 아니라 그분의 인간적인? 음. 이것도 우습네. 그래도 비유하자면 인간적인 미가 보기 좋은 거야. 영웅의 위대한 업적을 듣고 싶어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웅의 실수나 인간적인 면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관점의 차이일 뿐이지 영웅을 좋아하는 건 같을 거라 생각해. 그나저나 우리가 하루 이틀 보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다니 너무 슬퍼, 메이플. 내 여린 마음에 상처가 난 것 같아. 지금 내 눈가에 고인 눈물 보여? 안 보인다고? 조금 더 잘 살펴봐, 메이플. 지금 찔끔, 하고 눈물이 났다니까?

눈물 같은 거 안 났으면서 메이플을 놀리지 마, 제이. 아니라고? 지금 입가에 미소가 만연한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메이플, 제이의 말처럼 사람마다 다른 관점이 있는 거고 너는 우리를 잘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나저나 오늘도 알터는 시이 님에게 웃으면서 없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더라. 뭐라고 하지. 알터가 평소에도 무뚝뚝한 편은 아니지만 시이 님을 볼 때면 더 눈이 빛난다고 할까. 좋아하는 공을 던져주기 직전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우리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었어.

너희 알렝 말이지? 비슷하긴 하네. 아, 배 아파.

그렇게 웃지는 말고, 제이. 메이플 어깨도 치지 마. 메이플이 아프다고 하잖아. …뭐어, 늘 비슷한 느낌이긴 해. 알터가 밝게 인사를 건네면 시이 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수줍게 웃는 그런…. 시이 님 본인은 모르시는 것 같지만, 알터를 볼 때마다 그 눈동자가 유달리 빛나더라. 평소에는 잔잔한 호수의 느낌이라면 알터를 볼 때는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담은 호수와 비슷하다고 할까. …귀여웠지. 응. 엄청 귀여우셨어.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 분에게 연정을 품는 건 위험한 일이야, 베티. 나는 내 친구가 위험한 길에 빠지는 걸 원하지 않아.

…메이플, 너의 그 우정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고 혼을 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내가 시이 님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런 감정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야. 애초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연정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제이, 너는 그만 좀 웃어! 끄응. 아무튼 그런 시이 님을 보면서 알터의 뺨도 조금 붉어진 것 같았는데…. 다시 생각해도 저 두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우정과 친애, 그런 감정이라면 나는 너희와도 친구가 아니야.

우리 우정이 그렇게 끝나는 거야? 아, 농담이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 두 사람이 그런 뜨거운 눈빛으로 보면 나라도 부끄럽거든~. 아무튼 시이 님과 알터의 감정은 연애 소설에 나오는 그런 감정이겠지. 두 사람 다 둔감한 탓에 서로가 같은 마음인 걸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걸 흔히 삽질한다고 말하지 않나.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온 거야. 그리고 타인의 연애사를 단순히 유희로 치부하지 말라고 했지?

메이플,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너도 즐겁잖아? 베티의 펜이 움직일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던걸. 네가 어제까지 읽고 있던 소설과도 비슷한 상황이라서 더 몰입되는 것 같은데. 아, 아니야? 미안, 미안. 그런 소설을 읽는 게 비밀이었는지는 몰랐네! 그렇게 화내지는 마. 내가 일부러 말한 건 아니잖아. 응?

고의가 다분해 보이는 시점에서 이미 글렀다고 생각하는데, 제이. 아니라고 말할 거면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어떻게든 해보던가. …응?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나나 메이플이 이야기는 해줬지만 그건 우리의 관점으로 말하는 거잖아. 평소의 너라면 즐거운 가십거리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모른다면서….

내가 직접 봤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고 우연히 지나가다가 보게 된 거지만.

…대체 뭘 봤길래 네가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

알터가 시이 님이 떨어트린 사탕 막대기를 줍는 그런 거? 평범하지.

…전혀 평범하지 않잖아?! 아니, 나도 알터가 가끔 시이 님이 실수로 떨어트리고 간 포장 리본이라던가 종이 뭉치를 줍는 건 봤었지만 그걸 평범하다고 말하기는 좀….

잠깐만. 지금 너희 둘의 말을 종합하자면 알터가 시이 님이 버린 쓰레기도 줍는 스토킹을 한다는 말이야?

평범하게 상대를 알고 싶어하는 그 마음인 거지. 범죄라고 하기에는 또 그렇고 순수한 애정이 엇나간다면 딱 이렇지 않을까, 하는 정도? 알터가 하는 행동이 더럽고 음습한 그런 느낌은 아니었거든. ‘시이 님이 정말 좋아!’하면서 베티의 말대로 없는 꼬리를 붕붕 흔들면서 따라다니는 느낌이라고 할까. 물론 저대로 괜찮은 건가, 싶지만 옆에서 굳이 알려주긴 싫거든~. 재밌잖아.

재미있다는 이유로 저 문제 행동을 방치한다고? 제이, 순수한 애정이라고 해도 그건 좀 아니잖아. 베티, 너도 뭐라고 한 마디 해.

메이플, 우리가 꼭 알려줘야 할까. 두 사람의 삽질 애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베티, 너마저 이렇게 나오다니.

다수결로 메이플 양의 의견은 기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메이플, 우리가 이렇게 떠들어봤자 제3자일뿐이야. 가서 말한다고 한들 흔히 말하는 오지랖만 부리는 거지. 안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말을 해야….

제이의 말이 맞아, 메이플. 게다가 시이 님이나 알터가 우리들이 그걸 지켜봤다는 걸 알면 기분이 좀 그렇지 않을까. 그 두 사람에게도 사생활이라는 것이 있는데….

베티, 내 눈을 보고 말을 해봐. 지금 내 눈을 피하고 있잖아. 정말 그런 이유가 맞아?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이해해 줄게.

…재미있어 보여서 그만두고 싶지 않습니다, 메이플 님. 그러니까 시이 님이나 알터에게 말하는 건 참아주세요. 제발. 응? 소소하면서 재미있는 두 사람의 일상을 보지 못하면 하루가 너무 지루해서 울어버릴지도 몰라.

메이플, 너도 고민하는 거지? 말하지 않고 넘어가자니 양심에 찔리고 그렇다고 말하자니 네가 오지랖을 부리는 게 아닐까, 싶고. 게다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음. 친구로서 조언을 해주자면 조금 더 후회하지 않을 쪽을 선택하는 게 좋아~. 그리고 크게 문제 될 것 같으면 르웰린 도련님이 두 사람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을까. 그 도련님이 이런 걸 방관할 사람은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 게다가 르웰린 도련님도…. 아니야.

시이 님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잠깐.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메이플, 제이. 르웰린 도련님이 지금 시이 님을 좋아하다고? 언제? 아니, 그것보다 너희 둘은 어떻게 안 거야? 나는 전혀 몰랐는데?! 그런 재미있는 사실을 지금 나만 쏙 빼놓고…!

베티, 혹시 내가 뭘 잘못했어? 뭔지 모르지만 미안해. 그러니까 그만 좀 웃겨.

베티, 미안한 말인데 정말 몰랐던 거야? …응. 그렇구나. 그렇게까지 배신감 어린 눈으로 나를 볼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 진정을 좀 해. 제이, 너도 책상 좀 그만 치고. 너무 그러다가 책상이 부서지겠어. 아니라고? 전에 네가 그렇게 책상을 치며 웃다가 부숴버리는 바람에 같이 수습해 준 게 나였다는 사실도 잊었구나.

그 도련님은 대체 언제부터 시이 님을 좋아하게 된 건데? 그것보다 시이 님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는 않겠구나. 응. 시이 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매력이니까 나는 이해해. 그나저나 시이 님은 그 도련님을 절친한 친구로 보지 않았어? 알터와 친하게 지내는 것 같으면 질투도 하고 그런…. …아? 어?

이제 알았나 보네, 베티. 아. 너무 웃어서 숨쉬기가 힘들어. 메이플, 내가 여기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원인은 베티라고 전해줘.

이런 걸로 쓰러질 수는 있겠지만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 제이. 그것보다 베티, 입이라도 좀 다물어 줄래.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그게 그런 의미인 거냐고 물어봐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야. 맞아. 알터와 시이 님이 서로에게 그런 감정을 품은 후에 그런 건지 아니면 르웰린 도련님이 먼저 시이 님을 좋아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르웰린 도련님은 시이 님을 좋아해. 우정이 아닌 연정으로. 물론 르웰린 도련님이 티를 안 내시는 편이라 베티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긴해.

지금 와서 그렇게 말해봤자 의미 없거든. 됐어. 나만 또 둔한 사람인 거지. …그나저나 너희 둘은 어떻게 안 건데? 나야 너희 둘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도련님은 시이 님이 알터에 관해 말할 때마다 묘하게 짜증 섞인 말투나 태도였다는 걸 깨달았지만….

시이 님이 그 도련님을 꼭 안는다거나 다정하게 굴 때 표정에서 드러나거든. 누가 봐도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라던가 더듬거리는 말투라던가. 아,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갑자기 안으시면 안, 됩니다…. 나는 그 도련님이 누군가로 인해 부끄러워하고 말을 더듬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니까. 정말 진귀한 광경이었지. 아, 메이플. 그렇게 엄한 표정 짓지 마. 나는 그 도련님이 그랬다는 사실에 놀란 거지 말 더듬는 걸 놀리는 게 아니니까.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제이. 그리고 시이 님이 본인의 몸을 잘 안 챙기시는 편이긴 하잖아. 무리하는 감도 있고. 그럴 때마다 르웰린 도련님이 시이 님을 걱정하는 게 눈에 보이거든. 더 챙겨주고 싶어 하시면서도 시이 님이 우리와는 다른 존재인 것에 대해 착잡하게 느끼는 느낌이라고 할까. …베티. 너도 같이 봤잖아. 그런데 너는 그걸 그저…. 아니다. 너라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응. 포기한 건 아니야. 그냥 너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 실감한 것뿐이지. 르웰린 도련님에게는 안타까운 말이지만 그런 행동 덕분에 시이 님이 르웰린 도련님을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거겠지.

연애 상대는 아닌 소중한 존재 말이지. 서글픈 일이지만 어쩌겠어.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원래 그런 법이야. 뭐어, 그나마 그 도련님이 본인의 감정을 자각하고 있어서 다행인가. 세 사람 다 무자각 연정이면 재미없잖아?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그런 표정으로 보지 좀 마, 메이플. 네가 그렇게 노려볼 때마다 한 대 때리려는 고양이가 생각난다고!

한 대 더 때려도 말리지 않을게, 메이플. 더 때려. …그나저나 그 세 분의 관계는 참 복잡하네. 우선 시이 님은 알터를 좋아하고 있지. 남자와 여자의 그렇고 그런 감정으로 말이야.

베티, 그렇고 그런 감정이라니. 그런 표현은 우리 아버지나 쓸걸? 서로 양방향 삽질 짝사랑을 한다는 걸 누가 그렇게 표현해.

나는 계속 이렇게 쓸 거거든? 그리고 알터도 시이 님은 성애적으로 좋아하고 있고. 이렇게 본다면 시이 님과 알터는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모르는, 그런 답답한 상황인 거지. 응. 나 이런 소설 봤어. 그만 읽고 싶어서 책을 내팽개쳤다가 그래도 참고 다시 보자, 하면서 다시 보기를 반복했었는데….

그거 내가 추천해 준 소설 아니야, 베티? 내가 추천해 준 소설을 그런 식으로 봤었다고?

…아. 아, 아아니. 그러니까 메이플, 내 말은 일단 독서에도 나름대로 추진력이라는 게 필요한데 그걸 얻으려면 잠깐의 후퇴가…!

그러게 왜 그걸 말하고 그래, 베티. 너는 솔직한 게 매력이지만 메이플 앞에서는 입을 조심했어야지. 흠. 두 사람은 양방향의 감정이니 자각만 한다면…. 뭐. 그 자각하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알터는 시이 님을 볼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그저 동경하고 좋아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할 테고…. 시이 님은 본인의 감정을 알긴 하는 것 같은데.

시이 님은 본인의 감정을 알고 계셔?

알고 계신 것 같던데. 언제였지. 내가 떨어트린 손수건을 알터가 주워 준 적이 있었거든. 고마우니까 웃으면서 말했더니 시이 님의 표정이 좀…. 내가 알터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오해하는 것 같더라고. 나는 그냥 고마웠을 뿐인데.

그런 시이 님을 못 보다니 아쉽다. 언제 그랬는데? 왜 나는 그때 없었던 거야? 응?

그때의 베티 양은 알렝을 산책시키는 중이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표정으로 나를 봐도 어쩔 수 없거든? 아무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시이 님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알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흠. 사람이 아닌 생물에게도 사랑받는다고 생각하려나. 그건 좀 심각한데. 나야 귀엽다고 웃으면서 넘기지만 우리 메이플 양 같은 사람은 당황할지도 모르겠네.

저는 시이 님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말하겠지.

그 말을 듣고 없는 꼬리를 추욱 늘어트릴 알터와 입술을 꾹 깨물 도련님이 떠오르네. 음. 조금 재미있을지도. 그 두 사람이 있을 때 그렇게 말하도록 해, 메이플. 말하기 전에 나한테 미리 언질도 주고. 그런 재미있는 광경을 놓칠 수는 없잖아?

나도! 나도 꼭 불러줘야 해. 알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보러 갈 테니까! 약속이야.

너희에게 뭐라고 말 못 하겠다. 설령 그런 상황에 부닥친다고 해도 너희 둘은 부르지 않을 테니까. 아무튼 관계도를 더 정리하자면 르웰린 도련님은 본인의 감정을 잘 아시는 것 같아. 그렇다고 그 감정을 시이 님에게 적극적으로 내비치지는 않지만….

내비쳤다면 다른 의미로 재미있긴 했겠다. 한 여성을 가운데에 둔 두 남성의 우당탕 애정 쟁탈 전쟁. 그녀의 마음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이런 느낌으로 말이야. 아. 시이 님은 좀 곤란해할지도 모르겠네. 친구라고만 생각했던 도련님의 고백. 그리고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 강아지 같은 소년. 너는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르웰린? 우리는 친구일 뿐인데. 시이 님, 저는, 저는, 당신을…. 그리고 그 모습을 보게 된 알터의 반응은?!

제이, 꼭 소설가가 됐으면 좋겠어. 세 사람을 생각하면 말려야 하는데 너무 흥미로워서 다음 편도 써달라고 하고 싶거든. …그래서 르웰린 도련님은 시이 님을 연모하지만 감정을 내비치진 않고 알터에게는….

질투는 하는 것 같아. 르웰린 도련님도 사람이니까 질투를 안 할 수는 없겠지. 가끔 시이 님과 알터가 함께 있을 때면 은근슬쩍 끼어들 때도 있으시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야. 으음. 어떻게 설명해야 베티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그래도 그 알터나 시이 님보다는 감정에 대한 이해가 빠른 편인데 왜 이런 취급을…. 시이 님과 알터의 사이를 인정하면서도 인정하기 싫은 느낌이라는 거지?

이해가 참 빠르네요, 베티 양. 칭찬 도장을 콩, 하고 찍어줄까. 농담이야, 베티~. 너무 화내지는 마. 사람 감정이라는 건 그렇잖아. 그 도련님도 어쩔 수 없는 거야. 물론 저번에 시이 님과 알터가 샌드위치를 나눠 먹을 때 꼭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건 우스웠지만. 죄송합니다. 전혀 안 죄송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던 걸 너희 둘 다 봤어야 했는데. 뭐. 알터나 시이 님은 그 도련님이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갑자기 삼각형은 왜 그리는 거야, 제이?

자. 이게 그 도련님과 시이 님, 알터의 관계야. 예쁜 삼각형이 그려져야 하는데 서로 삽질만 하는 바람에 삼각형이 아니라 못난이가 되어버렸어. 나는 이런 삼각형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든. 망한 사랑도 좋고 서로서로 사랑하는 것도 좋고, 어느 한쪽도 이어지지 않는 것도 좋지만 이런 건 좀 과다한 설정이 아닐까, 싶어. 이게 소설이었으면 독자들이 들고 일어났을걸? 작가는 누굴 메인 남주인공으로 할 것인지 똑바로 정해라. 이런 식으로.

왜 나를 보면서 말하는 건데, 제이. 다 알고 있다는 표정도 그만둬. 물론 내가 저번에 읽었던 소설이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라 작가님에게 메인 남주인공이 누구인지 이제는 정해달라고 편지를 쓰긴 했지만…. 아니, 그렇지만 소설의 전개가 중반을 넘어서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데 메인 남주인공을 정하지 못하는 건 너무하잖아.

그래, 그래. 그건 좀 심했지. 그런데 그 소설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 시이 님과 두 남자의 관계거든. 어쩌면 지금 이 세 사람은 그 소설보다 더한 광경을 보여줄지도 몰라.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글쎄. 저길 좀 보고 말하지 그래?

행복해 보이네, 알터. 시이 님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저런 표정을 짓는 게 정말…. 분명 달려있지 않은 꼬리가 연신 흔들리는 게 보여. 갈색의 풍성한 그런 꼬리말이야. 그리고 르웰린 도련님은…. 응.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이는데 저대로 둬도 괜찮을까. 미간에 주름이 더 깊어지는 것 같은데…. 시이 님. 시이 님? 제발 옆을 보세요. 르웰린 도련님이 알터만 쓰다듬어 주는 걸 질투하고 있다고요. 아니, 알터를 그렇게 귀엽다는 듯이 보면서 웃으시지만 말고요. 물론 저는 시이 님이 행복하면 됐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기록하는 것뿐이야, 베티. …르웰린 도련님, 시이 님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알터만 쓰다듬어서 화났냐고 물어보는 말에 그런 거 아니라면서 쑥스러운 듯이 시선을 피하시면…. …제이, 책상 좀 그만 치라니까. 타인의, 특히 저 세 사람의 연애를 네 웃음거리로 삼으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책상이 부서지기 전에 적당히만 해둬.

그렇지만 저 도련님이 저런 식으로 쩔쩔매는 걸 어디 가서 보겠어. 안 그래?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둬야지. …오. 도련님의 자존심보다는 그래도 애정이 우선이라는 건가. 저 도련님이 고개를 숙여줄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그렇지만 이번에는 알터가…. 물론 기분 나쁜 티를 내는 건 아니지만 고개를 기울이는 게 손길을 빼앗겨서 억울한 강아지 같아 보여. 우리 알렝이 다른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는 걸 보면 저런 표정을 짓거든. 다른 친구도 쓰다듬어 주는 거야? 나는 더 안 쓰다듬어 줘? 이런 느낌이라고 할까.

알터는 강아지가 아니라 사람이야, 베티. 그것보다 뭐라고 하지. 음. 이런 말을 감히 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이대로 저 셋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지?

어떻게 알았어?

나도 그렇거든. 사람의 관계가 정해져 있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애매모호하게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 게다가 저 세 사람이라면 큰 문제도 없을 것 같고. …뭐어, 이건 우리 희망 사항이고 저 세 사람은 어떨지 모르는 거지만 그래도 저렇게나 기분 좋게 웃고 있는데 보기 좋지 않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질 정도야. …베티 양, 타인의 동의를 얻지 않은 채 몰래 그리는 건 범죄랍니다. 사소한 범죄는 알터의 귀여운 스토킹으로도 충분하거든.

그렇지만 제이, 네 말대로 저렇게나 보기 좋은걸. 저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아닐…. 아, 메이플! 아, 잘못했어! 안 그릴게. 더 안 그릴 테니까! 그러니까 그 그림은 압수하지 말아줘! 나의 작은 행복을 이렇게 잔인하고 악랄하게 강탈하다니 너무하잖아! 그리고 그 그림, 네가 가지려고 그러는 거지? 사실은 마음에 들었던 거지! 아니야? …아, 아! 잘못했어요, 메이플 님. 제가 실언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절 보지 말아주세요. 그림을 찢으려고 하지도 말아주시고요. 네?

내 말을 안 들은 네 잘못이야, 베티. 그림이랑 안녕해, 안녕. 그렇게 울먹거려도 돌려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포기하고. 그러게 누가 헛소리하래?

하하. 개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