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시르] 황제 AU - 연화님

c. 연화님

 

르웰린 신시엘라크는 귀하게 태어나 귀하게 자랐다. 그러니 황제의 옆, 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리라. 귀족이라는 존재들의 결혼이 무릇 그러하듯 애정이 있는 결혼은 아니었다. 다만 부모님들의 정치적인 결정에 따라 서로 부부의 연을 맺었을 따름이다. 불만은 없었다. 당시에는 그저 후계자에 불과하던 시이는 그에게 가져다 줄 명예나 권력 따위를 제하고 보더라도 괜찮은 결혼 상대였다. 좋은 정치적 동반자, 최후까지 믿을 수 있는 우군. 어쩌면 낯 간지러울 수 있겠지만 친구나 동료.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했고, 거기에 맞춰 살아갈 것을 합의했다. 비록 불꽃이 튀기는 사랑 같은 건 없었으나 상관 없었다. 어차피 그런 종류의 감정은 냉혹한 정치판에 살아남는데 있어 눈을 가리게 될 뿐이니. 푸른 피들의 결혼이란 본디 그런 것이었다.

하여 르웰린은 시이가 어느 날인가부터 기사단 연무장에 종종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예상한 일이 생겼다 받아들일 뿐이었다. 인정하고 싶은 바는 아니나 그도 시이의 곁을 지켜줄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생각하기는 했다. 시이 리리아는 명백히 흔들리고 있었다. 외적인 자리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이유였다. 황제의 책무, 가장 위에 선 자가 마땅히 버려야 하는 감정들, 지키지 못한 것들, 모든 결정에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비난. 그걸 견딜 수 있을 만큼 강인한 것과 매순간 상처받을 만큼 여린 건 전혀 다른 문제였으므로. 하지만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세간에서는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자들을 푸른피라 부르지만, 사실 그들에게 흐르는 피 역시 붉다. 제국 만민에게 황제란 신이고 감히 범접하지 못할 존재일지 모르나, 르웰린이 보기에는 황제라 한들 본질적으로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기댈 구석이 필요하다. 르웰린은 시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때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대 정도는 되었으나, 진정 기댈 수 있는 상대는 되지 못했다. 하니 어쩌겠는가. 일국의 황제가 무너지게 둘 수는 없으니 기댈 구석을 만들어 왔다면 용인하는 수 밖에. 물론 그것이 정체모를 아무나를 가만히 둔다는 뜻은 아니었다. 적어도 어떤 자인지 확인은 해야했다. 르웰린은 여상한 말투로 시이가 자주 찾는다는 기사에 대한 정보를 모아오고, 약속을 잡으라 명했다. 만약 불손한 목적을 가진 자라면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할 터였다.

며칠 뒤 르웰린은 잔뜩 긴장한 채 찾아온 어린 기사를 마주했다. 물론 마냥 어리다 칭하기엔 그와 나이가 크게 차이 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평민이라는 점과 황실 기사단 소속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잘못된 수식어는 아니었다. 르웰린 자신도 이런 중대한 직위를 맡고 있기에 어린 것이 사실이었고 말이다. 그는 가문의 힘이 있었지만 연고도 없을 평민이 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릴 나이에 황실 기사단에 들어온 능력은 가점을 쳐줄만하다.

“우선 앉으세요.”

“네, 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알터는 반사적으로 르웰린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가 당황한 기색을 했다. 엉겁결에 따라놓고 이것이 예법에 맞는지, 응당 과분하다 거절했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는 티가 고스란히 났다. 연기라면 제법 교활한 자이겠지만 글쎄. 르웰린은 알터의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변에 일렁이는 죄책감을 들여다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다 후다닥 시선을 내려버리는 모습은 한없이 어리숙하기만 하다. 기사단 내에서의 평판도 나쁘지 않았으며 몇몇 불만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고매하신 귀족 나으리들이 평민에 밀려 내뱉는 헛소리를 구분 못할만큼 바보같지 않았다.

“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는 알고 계시겠죠.”

안절부절 못하며 뒤척이던 몸이 한순간 굳는다. 이 정도로 두려워하고 미안해 하면서 감히 황제에게 접근할 담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르웰린은 구태여 부언하는 대신 해명해보라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어물어물 말을 시작하지 못하던 알터는 두 눈을 꽉 감았다가 뜬다. 긴장은 맹목에 눌려 사그라든다. 르웰린의 생각이 오해임을 단호하게 못박은 목소리가 더 이상 흔들림 없이 단단하다. 단조로운 시선으로 알터를 보던 르웰린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건 조금 흥미로웠다.

“폐하를 예전부터 쭉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제국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애써 오셨는지 오랜 시간 들어왔고, 늘 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생각 하시는 그런 감정이 절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다정하시니까, 이런 저도 신경 써주시는 것 뿐이라 생각합니다.”

순간 스치는 건 근래들어 풀어진 시이의 얼굴이다. 이 드넓은 궁궐의 그 누구도 무너져가는 시이를 지탱할 수는 없었다. 알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설령 지금은 아니라고 한들 과연 시이가 알터를 끝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르웰린은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눈 앞의 기사가 품은 감정 역시도. 원래 모든 감정이란 한끝 차이인 법이다. 아예 관심이 없다면 모를까 저토록 깊은 동경이 기어이 사랑에 한 발자국 걸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르웰린은 알터가 처음에 보였던 죄책감을 상기한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던 그 감정. 아마 두 사람은 정말 연인 관계는 아닐 것이다. 태연스레 거짓을 꾸며낼 성격은 되지 못하는 것 같으니. 다만 르웰린이 보기에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사랑해버린 듯해서. 오직 알터의 저 둔한 성정과 시이의 조심스러움 만이 마지막 남은 장벽인 게 분명해서.

“그렇군요. 최근 정세가 어지러우니 혹시나 해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만, 뒤는 깨끗한 것 같고요.”

알터는 그것만은 절대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르웰린의 판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알터가 기꺼운지는 또 다른 문제가 아닌가. 제가 유일한 반려로 남아있으리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그건 정치적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시이에게 다른 이가 생기는 건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현실이란 생각보다도 유쾌하지 못하다. 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 내려놓은 찻잔에서 드물게 달칵 소리가 난다. 즐겨마시던 차이건만 익숙한 풍미 대신 씁쓰름함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알터가 시이 옆에 서는 걸 막아설 수 있는 명분은 없다. 충성스러우며 야심도 보이지 않고 신분도 대단치 않아 그의 자리에 위협이 될리도 없다. 무엇보다, 그래, 지금의 시이에게는 알터가 필요했다.

“시간을 너무 빼앗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제 가보셔도 좋습니다.”

하니 르웰린이 부린 아주 조그마한 방해는 그들의 관계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 탐탁치 않은 상황을 눈 감아 주는 걸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구태여 등까지 떠밀어줄 생각은 없었다. 미묘한 궁중의 언어를 알아채긴 한 건지 마냥 환해진 얼굴을 한 알터가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는 화원을 빠져나갔다. 르웰린은 알터 쪽에 놓여진 찻잔을 치우라 명하고 새로 올려진 찻잔에 차를 따랐다. 곧 찾아올 사람을 알고 있었다.

“르웰린?”

“시이님.”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 황제. 제국의 수호자. 거창한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불려온 이름에 르웰린이 고개를 돌렸다. 시이였다. 익숙한 걸음으로 르웰린의 맞은편에 앉은 시이가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알터처럼 르웰린이 오해하고 있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굳이 명시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저 선연한 미안함과 알터라는 이름을 말할 때 스르르 풀리는 얼굴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차마 먼저 통보하지는 못해서 말을 빙빙 돌리기만 하는 건 배려인가 잔인함인가.

“언제까지나 궁을 저 혼자 채울 수는 없는 일이죠. 약속을 지키실 것이란 사실도 알고요.”

이 확고부동한 정실의 자리는 언제까지나 르웰린, 그의 것일 터다. 애초에 그들 사이의 약속이란 오직 그 뿐이었다. 사랑은 필요치 않다. 어떤 자가 다른 궁을 채우든 감히 그의 자리를 위협하거나, 그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는 것. 그리고 서로를 돕는 것. 하여 르웰린은 성대하던 혼인식에서 들은 약조를 다시금 읊는 시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속만 지켜진다면 정말로 다른 건 괜찮았다. 어차피 그가 시이에게 품은 마음이란 충성과 우정, 동료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르웰린이 지금 걸음을 멈춘 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전 암묵적으로 알터와 시이의 관계를 인정한 뒤로 두 사람이 함께하는 모습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건 예상했었다. 살갑게 대해줄 생각은 없었으나 구태여 피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세상 일은 늘 마음 같지 않다. 풀어진 얼굴. 르웰린은 제가 요즘의 시이를 묘사할 때 썼던 단어를 생각한다. 그 말은 틀렸다. 알터를 눈 앞에 둔 시이의 얼굴은 그런 가벼운 단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새초롬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하늘을 닮은 눈동자에 태양 같은 생기가 깃든다. 찬연한 기쁨과 꾸며내지 않은 미소가 입가에 걸려있다. 궁중의 철저한 예법 따위는 알지 못하는 알터가 스스럼 없이 애정을 표하면, 제 몸을 옥죄던 의례들을 벗어던진 해맑은 웃음소리가 정원을 울린다. 어떤 이해관계도 끼어들지 않은 온전하고 절대적인 애정이 서로를 향해 곧게 향했다. 깨달음은 다가오고야 만다. 시이 리리아는 변했다. 그가 짧지 않은 세월 함께한 황제는, 그가 모르는 곳에서 더욱 굳세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하여 이어서 드는 생각은 제가 하지 못한 것들이다. 르웰린은 떠올리지도 못하고, 떠올린다 한들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수많은 귀족답지 못한 행동들. 그러나 시이를 흔들고, 일으켜 세우고, 끝내는 웃게 만든 행동들. 무언가 했더라면 달랐을까 후회하지만, 알터가 시이에게 준 것은 제가 절대 줄 수 없는 것들임을 안다. 르웰린은 알터와 시이가 그를 발견하기 전에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은 그들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자잘한 감정 같은 건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정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시이가 점점 여유를 찾아가는 건 묘한 감상을 주었지만 오래 고찰할 시간은 없었다. 궁을 넘어 수도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로 물드는 동안 르웰린은 점점 일에 치여갔다. 기계적인 손길로 마지막 점검까지 마친 르웰린은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피곤이 겹겹이 쌓여있던 얼굴에 금새 그린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만치 시이가 조금은 단정치 못한 걸음으로 그에게 달려왔다.

“예법에 어긋납니다, 시이님.”

“뭐 어때, 지금은 다들 바빠서 신경 안 쓸 걸? 그리고 늦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런 일이 없도록 미리 준비하셨어야죠.”

흐트러진 예복의 장식을 바로해주자 너무 엄격하게 군다며 살짝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이가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 연회장에 입장할 시간이었다. 이미 흠잡을 곳 없던 매무새를 다시금 가다듬은 르웰린이 턱짓하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그들의 입장을 고한다. 연회장의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사람들의 물결을 가로지른 두 사람은 가장 상석에서 마땅한 인사를 받았다. 의례적인 개회사 끝에 흐르는 건 르웰린이 고민을 거듭해 고른 느릿한 악곡이었다. 장중하고 아름다운 곡이 시작되자 시이가 먼저 손을 뻗어왔다. 늘 해왔던 것처럼 그 위에 사뿐히 손을 얹은 르웰린은 깍지를 껴오는 손에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장난스레 헤실 웃은 시이가 그를 슬쩍 끌어당겼다. 문득 인식한 건 제가 고른 것이 첫 춤곡 치고는 굉장히 느릿하며 함께 붙어서 춰야하는 곡이라는 사실이다. 평소보다 바짝 붙은 시이가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확실히 이 곡이면 발을 안 밟기는 하겠네."

뒤늦게 지난 연회가 떠오른다. 복잡한 곡을 골랐다가 단 한 곡을 추는 내내 혹사당하던 그의 발을. 글쎄. 사실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수 년 간 도저히 진전이 되지 않는 시이의 춤 상대가 되다 보면 발 몇 번 밟히는 정도는 그러려니 하게 되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여 오늘의 선곡은 발을 밟히는 걸 걱정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보다는-. 르웰린은 생각을 강제로 끊어냈다. 대신 바짝 붙어 귓가에 속닥이는 시이의 태도를 지적한다.

"이렇게 붙어계시면 다들 수군거릴 텐데요. 흐음... 곤란하지 않으시겠어요?"

신시엘라크 가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려 하시는 거다. 중도파에 대한 지지다. 의도적인 치하다. 귀족 들이 떠드는 소리가 벌써 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자리 어딘가 수많은 귀족들의 가장 끄트머리에 아마 알터가 있을 터다. 시이 리리아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대. 그에게 자신과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건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나 시이는 바짝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하고 말간 얼굴로 웃었다. 가볍고 싱그러운 목소리가 고한다.

"르웰린은 내 황후인걸. 괜찮아."

그건 아주 단조로운 사실이었으나 르웰린에게는 확고한 선언이 되어 들려온다. 주변에 늘어서있던 사람들의 존재가 흐려지고 산란하는 빛 아래 오직 그와 시이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음악소리가 별안간 멀어지고, 그 자리를 시이의 목소리가 메운다. 늘 매끄럽게 굴러가던 머리가 고작 네 음절의 단어를 이해하기까지 영겁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이 지나 문장의 뜻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자 낯이 뜨거워져 온다. 르웰린은 다급히, 그러나 누군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길게 굽이치는 연보라빛 머리카락이 적당하게 늘어져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그, 그런 말씀은 조심...하셔야 한다는 걸, 아, 아실 텐데요."

시이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한 발짝 다가서며 르웰린의 손을 끌어당겼다. 반사적으로 스텝을 맞추고 나서야 춤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인지되었다. 고개를 슬쩍 숙이고 있던 덕에 시이가 입은 드레스의 밑단이 화려하게 펼쳐져 피어났다가 사그라드는 모습이 보인다. 절반은 시이의 취향이었고, 절반은 그의 취향이 들어간 드레스였다. 여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들면 그가 손수 골라서 선물한 장신구로 치장한 얼굴이 보인다. 두어걸음 멀어졌다가 우아하게 회전하며 다가오던 시이가 발을 조금 삐끗한다. 그는 익숙하게 손아귀에 힘을 줘 시이를 지탱하며 실수를 감췄다. 당연히 그가 받쳐줄 것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은 시이가 다음 동작을 이어간다.

하여 르웰린은 또한 깨닫고 말았다. 그 역시 시이를 변화시켜 왔다는 사실을. 비록 시이가 사랑하는 상대는 못될지라도, 그것이 애정 한조각 받지 못했다는 뜻은 아닌 법이다. 르웰린은 그에게 물들어온 시이를 천천히 바라본다. 춤추는 무리에 끼지 못한 채 연회장 가장자리에 서있는 알터가 시야너머에 보인다. 알터는 절대 연회장의 중앙에 들어올 수 없다. 연회를 여는 황제의 첫 춤상대가 될 수도 없다. 그건 온전히 제국의 안주인이 가진 권한이다. 그보다 시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이며 같은 이유로 그와 시이가 함께 해온 시간을 넘어설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르웰린 역시 끝내 시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되지 못할 것이다. 기탄없이 애정을 논하지도 못할 것이고, 무너져가는 시이를 일으켜 세워줄 사람이 될 수도 없다. 저 온전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에 감히 범접할 수 없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 안다. 르웰린은 사람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잘 읽어냈고, 그건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도 민감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귀족이란 제 감정을 잘 감추어 누구도 읽어내지 못하도록 덮어둔 채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르웰린은 타고난 귀족이기도 했다. 춤이 끝나고 시이의 허리를 받쳐주며 되뇌인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르고, 얻지 못할 것에 대한 미련 또한 화를 부른다. 그러니 놓아 줄 것은 놓아주어야 하는 법이다. 두 사람은 밀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가장 찬란하고 높은 곳에 놓인 자리에 앉았다.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인 시이가 황실 의례들이 얼마나 귀찮은지에 대해 투덜거린다. 르웰린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고 또 적당히 잔소리를 하며 시이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황실에서 주최한 연회였다. 의젓하게 부모님을 따라 입장한 시이는 제게 쏟아지는 시선에 조금 어색한 듯 웃었다. 타고난 핏줄에 어울리지 않는 성격.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서있는 연회장에서 홀로 솔직하게 웃는 사람. 어쩌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수많은 사람과 인사하며 사교계 입성을 알린 시이에게 그날의 르웰린은 아마 기억에 없겠지만, 그에게는 꽤 인상깊은 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시이가 연회에 참석하는 날이면 그의 시선은 종종 시이를 따라갔다. 치열한 권력 다툼 속에 힘들어 하던 것도, 검은 속내를 감춘 사람들에 지쳐 숨어버리는 것도 르웰린은 전부 지켜봤다. 돌이켜보면 그답지 않은 관심이었다. 시이가 숨어버린 테라스에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서있던 날이 있었고, 드레스 자락이 찢어져 당황하던 걸 감춰준 날이 있었으며, 처음으로 춤 상대가 되어준 날이 있었다. 그 모든 추억을 지나 약혼 소식이 들려왔다. 부모님이 기뻐하셨을 것이다.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순간 만큼은 가문보다 말갛게 웃던 시이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결혼을 위한 준비가 어려운 줄을 몰랐다. 성대한 축복 아래 부끄러운 듯 짧게 이어진 입맞춤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래, 어쩌면 르웰린 신시엘라크가 시이 리리아에게 품은 마음이란 충성과 우정, 동료애 정도가 아닐지 모른다. 그는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해왔을지도 모른다.

멀지 않은 곳에 홀로 연회장을 서성이는 갈색 머리의 기사가 있다. 어리숙하지만 곧은 기사의 녹안이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늘 상대를 선명하게 읽어내던 그인데, 저 바보같을 정도로 정직한 감정을 똑바로 가려낼 수가 없었다. 저 녹안에서 읽히는 감정이 정말 알터의 것인지, 르웰린 자신의 마음에서 비친 것인지 분간 가지 않았다. 확실한 건 서로를 마주하던 순간은 얼마 지나지 않고 두 쌍의 눈동자 모두가 시이를 향했다는 사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