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터시이] 3000일♡

c. 연화님

 

알터는 긴장한 얼굴을 한 채 나무로 된 문을 응시했다. 준비했던 인사말 같은 건 머릿속에서 휘발된지 오래였다. 저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시이는 평소처럼 말갛게 웃으며 그를 반겨줄 터였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단어는 늘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서, 이번이 시이의 집에 처음으로 방문하는 순간이라는 걸 인지하고 나자 모든 게 낯설어졌다. 괜히 목을 가다듬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임무 중이 아니라 가볍게 입은 차림이 이상하지 않은지 점검한 뒤 머리를 매만졌다. 혹시 지금 바보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리저리 표정을 바꿔보다가 숨을 고르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엇. 그도 모르게 바보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문 틈 사이로 크림색 머리카락이 빼꼼히 보인다. 푸른 눈동자가 놀란 뜻 깜빡였다가 이내 반가움으로 길게 휘어졌다.

"알터! 왔으면 말을 하지 왜 앞에서 그러고 있어."

"시, 시, 시, 시이님! 안녕하세요! 그게, 저, 옷이 조금 이상하지 않나 확인하느라. 괜찮은가요?"

문을 완전히 열고 선 시이가 그의 차림을 훑었다. 가볍게 걸친 셔츠와 바지가 갑자기 낯설었다. 뭔가 더 차려입고 왔어야 했나. 색이 이상한가. 르웰린에게 괜찮은지 물어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하루 쉬는 만큼 더 많은 업무량을 맞이하게 된 르웰린이 면박을 줬겠지만 시이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옷? 예쁜데? 왜 그렇게 긴장했어. 일단 들어와."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시이님. 선물이요!  그러니까, 집에 초대해주셨으니까, 감사의 마음으로...."

"응? 선물까지는 안 챙겨도 됐는데. 고마워."

얼른 들고 있던 선물을 내밀자 시이가 환하게 웃으며 포장을 열었다. 상자가 열리자 달콤한 꽃 향기가 은은하게 방을 채웠다. 시이의 눈을 닮은 푸른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병이었다. 알터는 시이를 한 번 보고, 화병의 꽃을 한 번 봤다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후다닥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어쩐지 민망했다.

"저번에 주신 부케가 예뻐서요. 꽃뭉치 같은 거 말고 조금 더 제대로 된 꽃을 선물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그 부케! 잘 받았어? 르웰린한테 맡기긴 했지만 꽃은 잘 상하니까 걱정했거든."

"잘 받았습니다. 화병에 꽂아서 관리하고 있어요! 이 말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감사합니다. 꼭 마주보고 말씀드리고 싶었거든요."

원래 알터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멋있게 문을 두드리고 저번에 주신 부케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고 정중하게 선물을 건넨다는 계획이. 잠시 좌절하며 얼굴을 감싼 알터는 얕게 호흡하며 붉어진 얼굴을 식히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이는 집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곳에 화병을 가져다 둔 뒤 찬장을 열었다.

"사실 이멘 마하 쪽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됐거든. 집을 급하게 치우긴 했는데, 따로 식료품점에 갈 시간은 없어서. 우리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로흐 리오스 가봤어? 거기 엄청 맛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시이가 알터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따지고 보자면 식료품점에 갈 시간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만 요리를 할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로흐 리오스 같은 훌륭한 레스토랑이 있는데 굳이 직접 요리를 하는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이 결론이 도출되기까지 식재료들의 희생이 필요하기는 했다. 알터가 무려 집에 놀러온다는데 직접 요리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약간은 있었으므로. 하지만 가끔은 노력으로도 힘든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행히 시이의 말이라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알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이님이 좋아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좋아. 그럼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쉬다가 가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시이가 찬장에서 꺼낸 차를 막 한 모금 마시려던 알터는 다급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저녁을 사겠다고 강력하게 어필을 해봤지만 시이의 강철같은 논리를 이길 수는 없었다. 의기양양한 승리자의 미소를 지은 시이는 마지막으로 꺼내온 버터 비스킷을 탁자 가운데 두고 자리에 앉았다.

"요즘 많이 바쁘다며."

"아닙니다. 늘 에린을 위해 애쓰시는 시이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요."

"글쎄. 난 부탁받은 일들만 도와주는 거니까. 알터처럼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단체를 이끌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버터 비스킷을 반으로 가른 시이가 한 쪽을 입에 넣고 나머지 반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은 알터가 당장이라도 비스킷을 보존 처리하고 싶다는 얼굴을 한 채 비스킷을 입에 넣었다. 이제 소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별개로 달콤하고 고소한 맛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이런 쿠키를 좋아하시는 걸까? 다음에 선물로 드릴 쿠키를 굽는다면 버터 비스킷을 도전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연일 바쁘게 돌아가는 알반 기사단에 여유가 돌아와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벨린은 잘 지내? 저번에 만났을 때는 일거리만 잔뜩 주면서 잔소리해서 안부를 물을 시간이 없었어."

"아벨린님이요? 으음, 요즘 부쩍 바쁘시긴 하죠. 카즈윈님 때문에 고민이 많으신 모양이더라고요. 그래도 피네님이 여유로워지신 뒤로는 많이 나아지셨습니다."

물론 카즈윈은 아벨린의 고민 중 아주 일부일 뿐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일에 질린 기색을 한 시이는 한동안 아발론에 가지 못한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 생각은 일 분도 이어지지 못했다. 혹시 시이가 들릴까 싶어 벨테인 조에 기웃거리다 쫓겨난 일과 도저히 전해줄 방법이 없어 버려진 쿠키의 소식을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까워. 부엉이라도 보냈으면 내가 어떻게든 갔을텐데!"

"도저히 연락을 전할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이제 이렇게 휴일도 있고, 많이 여유로워졌습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다음에 똑같은 쿠키를 다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듣고서야 얼굴이 핀 시이가 시계를 확인하고 벌떡 일어섰다. 로흐 리오스에 갈 시간이었다.

"잘못하면 늦겠는 걸? 빨리 가자. 거긴 인기가 많아서 조금만 늦으면 줄이 길거든."

"네, 그럼 바로 출발할까요?"

벽에 걸린 밀짚모자를 챙겨 쓴 시이는 후다닥 문을 열고 집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햇빛이 내리쬐지만 저녁의 선선함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알터는 뒤따라 나와 조심스레 문을 닫고 손차양을 만들었다. 아직 햇빛이 비치는 시간에 바깥을 나온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어, 시이잖아. 오랜만이네. 한동안은 안보이더니. 돌아왔나봐?"

시이의 이름에 반사적으로 뒤돌아본 알터는 자연스럽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함께 뒤를 돌아본 시이가 상대를 알아봤는지 반갑게 손을 붕붕 흔들었다. 옆집에 사는 이웃인 모양이었다. 가벼운 한담을 몇 마디 나눈 이웃은 이내 알터에게 관심을 보였다. 짓궂은 웃음을 지은 소녀가 한 쪽 눈을 찡긋거리더니 시이에게 눈짓했다.

"이쪽의 신사 분은?"

"어, 어! 아는 사람."

"그냥 아는 사람이야? 시이 집에서 누가 나오는 건 처음 보는데."

알터는 자신이 감정을 숨기는데 썩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슬쩍 고개를 틀어 숨긴 얼굴이 온통 붉었다. 모든 처음은 특별하다. 그저 이웃이 못본 것일 수도 있는데, 그가 시이의 집에 처음 방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심장 어림이 간지러웠다. 그나마 시이가 그보다 한 걸음 앞서있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게 아니라며 부정하는 시이와 아무말도 못한 채 얼굴만 붉히는 알터를 흥미롭다는 얼굴로 지켜본 소녀는 두 사람을 더 곤란에 빠뜨리는 대신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과 함께 집 안으로 쏙 사라져버렸다.

"그럼, 얼른 밥 먹으러 갈까. 진짜 늦겠는 걸."

아까보다 이상하리만치 부산스러워진 시이가 허둥지둥 모자를 다시 쓰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거리를 척척 걸어나갔다. 아직 얼굴을 수습하지 못한 알터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색한 공기 속에 로흐 리오스에 도착한 두 사람은 호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켰다. 가로등 탓인지 아까의 대화 탓인지 알 수 없는 붉은 두 얼굴이 드디어 서로를 마주했다.

"그게, 그러니까, 아까 그 말은 신경 쓰지마! 원래 그런 소문을 좋아하는 애거든."

"괜, 괜찮습니다. 시이님만 괜찮으시다면, 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야 말로 신경이 쓰인다는 반증인 법이다. 두 사람은 적막 속에 치즈 그라탕과 코 코 뱅, 그리고 티본 스테이크를 묵묵히 먹었다. 평소에 어떻게 식사를 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스테이크를 잘라서 한 조각 건네주다가도, 우연히 손이 스칠 때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가 실감났다. 그들은 짧은 시간 안에 정말로 가까워져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삐걱삐걱 목각인형 같은 움직임으로 음료수를 하나씩 든 채 테라스로 나선 두 사람은 호수 너머에 화려하게 빛나는 공연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돌아온 침묵을 먼저 깬 건 시이였다.

"오늘 괜찮았어?"

"너무 좋았어요. 오랜만에 시이님도 뵈었고, 음식도 맛있었습니다. 다음에도, 또 놀러와도 될까요?"

"당연하지. 다음에도 놀러와. 선물은 안 들고와도 되니까. 그때는 저기 공연도 보러 가자. 멀리서 봐도 예쁘긴 하지만."

얇은 옷자락이 스치고 두 쌍의 눈동자가 드디어 서로를 제대로 마주봤다. 푸른 두 눈동자가 오늘 그를 처음 봤을 때처럼 부드럽게 휘며 웃음을 그렸다. 때마침 저만치 성당에서 누군가의 결혼식이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알터는 거대한 종소리 아래 시이를 보며 마주 웃었다.

"네, 시이님! 다음에 꼭 함께 보러가요."

그 앞에 조그맣게 속삭여진, 밀레시안의 청각으로 겨우 들은 예쁘다는 말이 공연장을 향한 것인지 시이를 향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