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시르] 센티넬 버스 AU_연화님

연화님(@End_And_00)
 
알터는 시이 리리아를 동경했다. 단순히 현시대 가장 강력한 센티넬이라 불리기 때문은 아니었다. 혜성처럼 나타나 밤낮없이 게이트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루어낸 업적에 으스대지 않고 구하지 못한 이들에게 미안해 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위험한 게이트라도 앞장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게이트 밖에서 안전하게 대기하다 던전을 정리하고 나온 센티넬들을 가이딩하면 되는 일반 가이드에 머무르지 않고 게이트에 함께 들어가는 던전 가이드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봐야 괜한 센티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결함있는 가이드 판정을 받았지만. 그런 주제에 시이의 전담 가이드 자리까지 꿰차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예의 그 사건이 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시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락했지만 알터는 종종 분에 넘치는 일을 맡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알터,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이님! 가이딩 수치는 괜찮으신가요?”
“응. 완벽해.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알터를 생각의 파도에서 건져냈다. 걱정스럽게 알터를 바라보던 시이는 자신을 찾는 외침에 알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워진 이후로 이따금씩 내비치곤 하는 허술함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할 강인함이 깃든다. 알터는 바야흐로 그가 동경하던 영웅의 모습이 된 시이에게 무사히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의 영웅은 언제나 그러했듯 짧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두려움 한 점 없이 팀과 함께 게이트에 뛰어들었을 따름이다. 시이 팀 소속 던전 가이드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알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탐낼 수도 없고, 탐내서도 안되는 자리였다. 결함있는 가이드로 비극을 초래하는 건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는 게이트 바깥에서 얌전히 기다리다 시이가 돌아오면 누구보다 열심히 가이딩하면 된다. 그러면 시이는 덕분에 훨씬 나아졌다며 웃어보일 터였다. 후방의 가이드들이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힘이 된다. 언젠가 시이가 해준 말을 되새긴 알터는 게이트가 점멸하며 진입한 센티넬과 가이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게이트 정리란 본래 주 단위가 넘어가는 기약없는 기다림이라 가이드들은 번갈아 가며 자리를 비우지만 알터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그는 시이가 게이트에서 나오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번에도 게이트를 정리하고 뿌듯한 얼굴로 걸어나오시겠지. 시이가 알터 하고 그를 부르면 믿음직스럽게 달려가 가이딩하는 광경을 늘 상상하곤 하지만, 걱정과 그리움으로 울상이 된 그를 시이가 달래가며 가이딩 받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어른스럽게 굴어야지. 부질없는 다짐을 하던 알터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굳어져갔다. 주변의 다른 가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림에 지쳐 늘어가던 빈자리는 어느 순간부터 다시 줄어들었다. 일반적인 게이트 정리 기간을 훌쩍 넘긴 까닭이었다. 크리쳐가 쏟아져 나오지 않는 걸로 미루어 볼 때 아직 전멸하진 않은 모양이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아직’이었다. 센티넬들이 근처에 충원되기 시작했다. 가까운 센티넬을 들여보낸 가이드는 울기도 했다. 우울함과 긴장감이 뒤섞인 곳에서 알터는 초조하게 자리를 지켰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시이는 게이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먼저 포기하고 울어버릴 수는 없었다. 믿어야했다. 그의 영웅은 언제나 그래왔듯 당당하게 게이트에서 나와 그를 불러줄 테니까. 이번에도 어른스럽게 맞이하기는 그른 것 같다. 그래도 시이님은 괜찮다고 말씀해주시며 가이딩을 받아가시겠지. 그거면 충분했다. 그걸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알터의 바람은 절반만 이루어졌다. 금방이라도 크리쳐를 쏟아낼 것 같던 게이트는 결국 점멸하여 사라지며 살아남은 사람들을 쏟아냈다. 들어간 인원의 절반도 안되는 숫자였다. 대기하던 가이드들이 달려나갔다. 당연히 알터도 그 틈에 끼여있었다. 연한 크림색 머리카락을 멀리서도 구별해낸 알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가까이 다가간 순간 굳어버렸다. 피였다. 폭주 직전의 불안정한 파장을 뿜어내는 시이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시이님. 그 짧은 한 마디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비틀비틀 다가갔다. 센티넬은 어지간한 부상으로는 죽지 않는다. 가이딩만 충분하다면 저 정도는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 피투성이 손을 잡고 가이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간절한 이 순간, 그의 결함이 문제를 일으켰다. 가이딩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애써 마음 한구석에 밀어놓았던 기억이 발작하듯 존재감을 드러낸다. 달려드는 크리쳐 앞을 막아선 센티넬. 솟구치는 피. 싸늘하게 식어가는 손과 꺼져가는 파장. 어딘가 막힌 것처럼 방출되지 않던 가이딩. 맞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알터씨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시이님 쪽 지원 바랍니다.”
르웰린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리고 손이 남는 가이드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너무 안심하고 살았던걸까? 던전 가이드가 아니니 급하게 가이딩할 일이 없을거라며 안일해졌나? 익숙한 죄책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가슴을 옥죄어 왔다. 시이의 곁을 지키지도 못하고 힘없이 밀려난 알터는 멍하니 서있다 센터로 반쯤 끌려가다시피 해 검사를 받고 입원해야 했다. 의사가 하는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만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시이님이 가이딩 받을 시간만 지체시켰지. 가이딩을 못하면 빠르게 대처라도 해야 했는데. 시이님은 괜찮으실까? 사과를 받아 주실까? 내가 보기 싫어지셨으면 어떡하지?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병실 문이 열렸다.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고개를 든 알터가 예상 밖의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르웰린!”
“시이님이 들려달라고 해서 왔습니다. 제가 제일 덜 다쳐서 회복이 빨랐거든요.”
“시이님은 괜찮으신가요?”
누가봐도 침울한 목소리에 인사만 하고 갈 요량으로 바깥에 서있던 르웰린이 잠시 고민하다 병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평소보다 다치긴 하셨지만 위급한 수준은 아니라는 설명에도 알터의 얼굴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뻔했다. 흐음 하고 숨소리를 낸 르웰린은 결국 대화가 길어질 것을 인정하고 의자를 옮겨 와 알터 앞에 앉았다.
“다른 가이드들도 많았고 금방 조치했으니 괜찮습니다. 전담 가이드를 시작했을 때부터 알고 있는 사안이었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니죠. 지금까지 가이딩이 제대로 안될 때 임시 가이드에게서 가이딩을 받아왔고요.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가이딩이었잖아요. 이번처럼 정작 가이딩이 급할 때 쓸모가 없으면, 저는-.”
녹색 눈동자에 순식간에 물기가 차올랐다. 보통 사람이면 당황할만도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당황하는 법이 없는 르웰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장지를 건네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말끝을 흐렸지만 이런 상황에서 알터가 하는 말은 거기서 거기였다. 또 과거 일까지 꼬리를 물고 올라가 자책하고 있겠지. 시이가 있다면 금방 달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시이는 적어도 이 주 동안은 병원 신세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알터를 달래는 건 꼼짝없이 그의 책임인 셈이다.
“알터씨만큼 시이님과 파장이 맞는 가이드도 없습니다. 알터씨 정도 매칭률이 되는 가이드가 있어야 만성 통증을 안 달고 살 수 있고요. 응급처치 수준의 가이딩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며칠 지켜보면 가이딩은 금방 돌아올겁니다.”
그리고 애초에 가이딩이 문제가 아니다. 시이가 알터를 좋아하는 건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알 수 있었다. 정작 애정을 받고 있는 본인이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서서 눈치가 없지만. 그와 알터가 함께 있는 건 지독히 신경쓰면서 차마 알터가 혼자 우울해 하도록 둘 수도 없어서 병문안을 가달라 부탁하던 시이가 떠올랐다. 운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센티넬 가이드 관계로 만나서 이렇게 서로 마음을 눈치 못 챈 채 엇갈리기도 쉽지 않을텐데. 짧은 상념이 스쳤지만 르웰린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재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잠자코 알터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음 가이딩 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돌아올 차례였다. 그리고 금방 회복해서 시이님을 졸졸 따라다니겠지. 그래야 했는데, 막상 고개를 들어 살펴본 알터의 얼굴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조금 더 도움이 되고 싶다 말하는 목소리가 서럽다.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다는 말에 안주하지 못하는 갈망 너머에서 르웰린은 이제 막 피어나는 풋사랑을 읽었다. 차마 그의 앞에서 꺼내놓지 못한 소망도.
“다시 던전 가이드가 되고 싶으신 건가요?”
화들짝 놀란 알터가 자격을 논했으나 선뜻 부정하지 못하는 태도야말로 그가 원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팀이 거의 전멸하고 본인도 죽을 뻔 했는데 자진해서 다시 위험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건 무모함인가 용기인가. 르웰린은 예의 그 사건으로 현장에서 은퇴한 어머니를 떠올렸다. 딱히 유감이 있지는 않았다. 가이딩 배분에 미숙한 신입 가이드를 위험한 게이트에 보낸 윗사람을 탓해야지 아직 가이딩 고갈을 겪은 휴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을 탓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르웰린은 껄끄러운 입을 물로 축이고 알터를 바라봤다.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훌륭한 가이드였다. 순수하게 가이딩 능력으로 따지면 전국에서도 손에 꼽히리라. 게이트 적응력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던전 가이드로 팀에 들어온다면 아마 이번과 같은 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리저리 재어봐도 온통 승낙해야 할 이유 뿐이었다.
“가이딩 고갈은 근본적으로 센티넬의 폭주와 비슷합니다. 위험하지 않다는 점이 다르지만요. 당연히 후유증 치료법도 있으니 원한다면 시이님께 여쭤보세요. 제가 말해줬다고는 하지 말고요.”
물론 르웰린은 딱히 비밀이 지켜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신뢰의 문제를 떠나서 알터는 뭔가를 숨기는데 지독히 재능이 없었다. 하물며 대상이 시이라면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는 쪽이 편했다. 험난한 치료를 권한 것도 모자라 그 위험한 던전에 들어가자 말한 셈이니 한동안 시끄럽겠지만 르웰린은 결국 알터가 이길 것을 알았다. 드디어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알터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르웰린에게 남은 일은 나중에 시이가 찾아오면 뭐라고 말할지에 대한 고민 뿐이었다.
하지만 르웰린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시이는 알터의 요청을 깔끔하게 수락했다. 만류하는 말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승낙에 수십가지 설득의 말을 준비했던 알터마저 정말 허락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못내 걱정스러운 기색을 한 시이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알터가 준비해온 자료를 가리켰다.
“얼마나 어려울지 알고 하겠다 말한 거잖아? 게이트에 들어가는 게 어떤 일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일일텐데 내가 막무가내로 막을 수는 없지.”
시이는 알터를 아끼는만큼 존중했다. 넘어야 할 장애물이 아닌 그 장애물을 치워주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허술하고 어리게 굴 때가 있는 것과 별개로 무엇이 진짜 알터를 위한 선택인지 알 만큼은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게 내가 막으면 되니까. 네가 위험에 빠지게 둘 정도로 약하진 않아.”
펼쳐진 자료를 정리해주며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알터는 감동한 얼굴을 했다. 확실히 그럴만한 말이긴 했지만 두 사람을 지켜보는 르웰린의 무표정에는 얕은 금이 갔다. 분명 그가 먼저 제안한 일이지만 마음이 뒤숭숭했다. 둘의 관계에 긴장감이 끼어드는 걸 기대했던가. 한 번쯤은 저 굳건한 관계가 흔들리길 바랐나. 그도 아니면, 이제 게이트 안에서마저 저들의 세계 바깥에 서있게 되는 게 싫은 걸까. 어느 쪽이든 꼴사나웠다. 그리고 르웰린은 제 감정에 우둘투둘 가시가 돋는 건 어쩌지 못해도 그걸 숨길만큼은 성숙했다. 해서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온 무표정은 언제나처럼 매끄러워 누구도 감히 그의 감정을 짐작해내지 못했다.
알터의 치료는 순조로웠다. 알터 본인과 지켜보는 시이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3자의 시선에서는 그랬다. 시이는 알터가 괴로워 할 때마다 르웰린을 찾아가 이게 옳은 일인지에 대해 고민했지만, 알터의 앞에서는 꾸준히 응원의 말을 건넸다. 그 태도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홀로 아는 르웰린은 어렴풋이 시이가 영웅이라 불리는 이유를 실감했다. 시이는 제 마음이 어떻든 상대의 선택을 온전히 지지하고 굳건한 버팀목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토록 굳건한 척 할 수 있는 사람이 유일하게 제 여린 부분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게 그의 앞이라는 사실이 문득 기꺼웠다. 알터는 절대 알 수 없을 부분이니 이정도는 욕심내도 괜찮지 않을까. 자꾸만 뻗어나가는 욕심의 줄기는 명정한 이성 앞에 꺾어졌다. 꽤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아는 까닭이었다.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잡생각을 털어낸 르웰린은 새로 배당된 게이트 정보를 가지고 시이를 찾아갔다. 알터가 팀에 새롭게 합류한 뒤로 맡은 첫 임무는 그들의 팀 절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곳에 새로 나타난 게이트 정리였다.
“또 거기야? 거기 별론데.”
축 늘어진 시이의 말에도 르웰린은 꿋꿋하게 작전 개요를 읽었다. 저렇게 말해도 시이는 게이트 들어가는 걸 거부한 적이 없었다. 당장 지난 번 폭주 직전까지 간데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지난 게이트도 그랬다. 예지 능력을 가진 그가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경고했음에도 시이는 결국 작전을 수락했다. 그렇게 위험한 곳에 내가 아니면 누가 가겠어? 르웰린은 아직 담담했던 대답을 기억했다. 푸른 눈동자 너머에 들어찬 책임감은 아래서 끓고있을 여리고 약한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너는 빠져도 좋아. 다른 팀원들한테도 경고하고 자원하는 사람만 추려줘.' 그 말을 듣고 빠질 수 있을리 없었다. 르웰린의 이름은 자원자 명단의 가장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그 때와 똑같은 얼굴을 한 시이가 물었다.
"이번에도 자원자를 받아야할까?"
"아니요. 이번에는 괜찮을 거에요."
이 말을 하기 위해 알터가 던전 가이드로 돌아오게 했고 센티넬 충원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의 '감'이 이제는 안심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게이트 진입 직전 바짝 긴장하고 있는 알터를 보니 정말 괜찮을까 싶은 의문이 순간 들긴 했지만 르웰린은 자신이 본 재능과 노력을 믿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닦는 사람은 결코 위기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므로, 알터는 잘 해낼 것이다.
“곧 크리쳐가 등장합니다. 전원 준비.”
르웰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름끼치는 비명이 귓전을 울렸다. 기괴하게 생긴 생명체가 지축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센티넬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어올리는 가운데 알터는 후방에서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마지막으로 겪었던 게이트의 기억은 시이를 보는 순간 힘을 잃는다. 시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지켜줄 것이며 또한 죽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이의 목숨이 붙어있기만 하다면 그는 어떻게든 시이를 살려낼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영원히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알터씨, 가이딩 부탁드립니다. 시이님, 오른쪽 벽을 뚫고 크리쳐 세 마리가 나올겁니다. 주의하세요."
지난 몇 달 간 막힌 적 없는 가이딩이 문제 없이 뾰족한 파장을 진정시킨다. 가이딩을 받는 짧은 시간마저 예지를 쓰며 사방에 경고를 날린 르웰린은 곧장 총을 잡고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한 때 그가 꿈꾸던 모습이었다. 동경이란 상대와 닮기를 바라는 감정이기에 그러했다. 하면 가이드로 게이트 안에 발을 디디게 만든 이 감정도 동경인가. 아주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터다. 저만치 크리쳐 두 마리를 한꺼번에 제압하며 전투를 끝낸 시이가 다가왔다.
"괜찮으신가요?"
"당연하지. 이제 초입인걸. 르웰린은 벌써 가이딩을 받은 것 같지만 말이야."
"예지 계열 능력은 가이딩 효율이 나쁘니까요."
"미래를 보는건데 그걸 효율이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가끔 이렇게 전투하는데 동원하는게 맞나 싶은걸."
한담을 나누면서도 알터의 안색을 세심히 살핀 시이가 이내 선두로 돌아가 출발을 알렸다. 가장 위험한 자리였고,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르웰린의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앞장서 뛰쳐나갔다. 여전히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그를 걱정하던 푸른 눈동자가 함께 떠오른다. 그건 닮고 싶다기보다 지키고 싶은 것이었다. 심장이 간질거리고 새초롬한 눈매가 웃음기를 담아 휘어지길 바라게 되는 걸 무엇이라 설명해야할까. 발목을 잡지 않은 걸 넘어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나 미움받지 않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 동경만이 그가 가진 감정의 전부인가. 때에 맞지 않는 사유는 다시 뛰어들어온 르웰린에 의해 중단되었다. 알터는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며 시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르웰린을 살폈다. 파장이 잠깐 사이 또 엉망으로 엉켜있었다. 꽤 아플 것이 분명한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르웰린은 끊임없이 능력을 쓰며 전투를 조율하고 있었다. 괜히 시이가 가장 아끼는 파트너로 알려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감탄을 연발하며 르웰린을 가이딩하던 알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효율이 나쁘다는 의미를 절절히 체감하게 되었다.
"우리팀 던전 가이드는 거의 르웰린 전담이야. 다른 센티넬들이 필요한 가이딩과 돌발상황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대신 혼자 가이딩이 엄청 필요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시이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티가 났다. 르웰린은 그것이 전담 가이드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에서 온 질투임을 기민하게 깨달았으나 알터는 그정도로 눈치가 빠르지 못했다. 감정의 영향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파장을 가이딩 부족으로 착각한 건 불행일까, 다행일까. 차마 질투 때문에 파장을 갈무리 못한 것 뿐이라 말하지 못해서 얌전히 가이딩을 받는 시이를 본 르웰린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애써 숨기고는 휴식을 취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게이트 내부에서의 휴식을 저런 황당한 일에 끼어들어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실수로 그와 눈을 마주친 뒤 민망함 반, 우쭐함 반으로 웃어보이는 시이의 얼굴 같은 건 본 적 없어야 했다.
"이제 괜찮으신가요, 시이님?"
"그럼. 멀쩡해. 고마워, 알터."
점점 어른스럽지 못했다는 자각이 들긴 했는지 굉장히 수상쩍은 인사를 남기고 도망친 시이는 한동안 알터 근처에도 오지 못한 채 전투에 몰두했다. 게이트 정리가 평소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모르는 알터만이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가이딩에 열중할 따름이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지만 이유를 모르는 팀원들은 유능한 가이드가 합류해 의욕적이 되었겠거니 어림짐작하고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이미지 탓인가. 믿음직한 팀장으로서의 면모만 봤을 사람들이라 무리는 아니었다.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르웰린에게는 기가 막히게도 이 쓸데없는 착각은 긍정적인 연쇄를 일으켜 게이트 정리는 예상보다 일찍 끝을 맺었다.
“마지막 개체 곧 등장합니다. 전원 준비.”
마지막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나타난 크리쳐는 그 위용에 걸맞지 않게 한순간 가루로 바스라져 흩날렸다. 전투를 준비하던 센티넬들이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특수 개조된 총을 겨누고 있던 르웰린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장 안전장치를 올리고 자세를 풀었다. 자색과 청색이 섞인 신비로운 보석안이 시이에게로 향했다.
“크리쳐 제압 확인. 방금은 능력 낭비입니다.”
“잔소리는. 이제 게이트 끝이라 해본 거야.”
투덜거리는 시이를 두고 게이트의 핵을 찾은 르웰린이 손아귀에 힘을 줬다. 이미 금이 쩍쩍 가 갈라져 있던 핵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완전히 빛을 잃었다. 공간이 무너져내리며 생긴 출구가 게이트 바깥을 비췄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들어온 것과 역순으로 나가는 탓에 시이의 차례는 맨 마지막이었다. 첫번째 탈출 조에 속했던 알터는 우르르 달려오는 가이드들 속에 파묻혔다. 시이가 다쳐서 폭주 직전의 상태로 돌아온 날, 아무것도 못하고 무력하게 서있어야 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때와 달리 멀쩡한 얼굴을 한 시이가 성큼성큼 게이트에서 걸어나온다.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도 그를 정확히 찾아낸 시이가 눈을 마주쳐 왔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피해가며 다가온 그가 환하게 웃었다.
“수고했어, 알터.”
알터는 그제야 자신이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가이딩 고갈이 다시 오면 어떡하지? 혹시 후유증이 재발해서 가이딩이 안되면 어떡하지? 게이트에 들어가 있는 내내 그를 옥죄던 불안이 드디어 모습을 감췄다.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살짝 비틀거리는 알터를 잽싸게 잡아챈 시이가 그를 폭 껴안았다. 두 개의 심장소리가 느리게 박자를 맞춰가고 맞닿은 피부를 통해 가이딩이 흘러들어왔다. 키 차이 때문에 반쯤 안긴 모양새인 건 미뤄둬도 되는 문제였다.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알터가 긴장한만큼 함께 긴장했던 시이는 마침내 한숨 돌렸다. 처음 만났던 때와 똑같이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가 그를 과거로 데려갔다.
시이 리리아는 영웅이었다. 현시대 가장 강력한 센티넬이며 국가의 안전을 수호한다. 하여 시이 리리아가 건재한 이상 모든 국민은 안전하다. 나라가 게이트로 들썩일 때마다 비슷한 내용의 선전이 연일 미디어 매체에 송출되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안전한 게 가능한 일인가. 시이는 늘 그 명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게이트 출현을 예측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한들 여전히 완벽하지는 않았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게이트가 발생하면 출동은 늦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게이트를 시이가 관리하는 것도 아니다. 시이의 몸은 하나였고 가장 위험한 게이트를 시이가 맡고 나면 남은 게이트는 다른 센티넬들이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늘 시이였다. 그가 모든 국가 소속 센티넬의 대표인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어차피 욕을 들을 거라면 혼자 듣는 게 낫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비난의 이유는 다양했다. 게이트를 제때 막지 못해서, 너무 많은 특권을 누려서, 직접 만나보니 화면 너머에서 보는 것과 너무 달라서. 처음에는 비난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고 개선하고자 노력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게 되었다. 비난에는 합리도 논리도 없으며 그의 사정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이는 대신 비난을 흘려듣는 방법을 배웠다. 효과가 있었느냐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수많은 악의와 비극, 그리고 죄책감에 지쳐가는 지난한 시간 속에 마법처럼 나타난 게 알터였다. 처음에는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에게 느끼는 호감 정도에 불과했다. 던전 가이드를 그만두게 된 이력을 듣고 챙겨줘야겠다 생각했다. 늘어난 책임에 어깨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처음 젖어들기 시작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던전 가이드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가 그였다고 말했던 순간일까? 다들 무디게 넘기게 되어버린 악의 넘치는 비난에 혼자 화내주던 순간일까. 그도 아니면 알터가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일지도 모른다. 시이님이라는 세 글자에 애정과 호의가 넘치도록 담겨 있어서 빠져들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그러니 사실 언제부터인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선의가 악의를 가리지 못하듯, 악의 또한 선의를 가리지 못한다는 걸 알터를 통해 알게되었다. 원망도 비난도 견디기 어려운 건 여전했으나 그것에 매몰되어 애정과 신뢰를 지나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다정하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어졌고 시시때때로 얼굴이 떠오르며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라 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랑이었다. 하여 진부하게도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선 영웅은 자신의 구원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환한 빛에 가려져 있던 상처가 보였다. 시이는 기꺼이 그의 구원이 상처입은 채로도 살아갈 수 있게 도왔다. 그리고 스스로 제 상처를 치료하겠다 결심했을 때 혹시나 더 다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도 굳건히 그 옆을 지켰다. 지금 그의 앞에서 해사하게 휘어지는 녹색 눈동자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물론 아직 상처가 다 나은 것은 아니다. 아마 거기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터다. 설령 다 낫는다해도 흉터가 남겠지.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의 구원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비극은 언젠가 극복될 것이고 그는 아주 오랫동안 알터의 옆에서 버팀목이 되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행복해질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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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근데 진짜 연화님 글은 레전드라는 생각이.
ㅠㅠㅠㅠㅠㅠ너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