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시르] 학원물 AU_나래님

 

by.나래(narae_com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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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방학이 끝나고 찾아온 개학 날 아침.

시이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부산스럽게 등교 준비를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꼭 짜내며 화장대 앞에 앉아서 거울을 들여다보던 시이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응, 알터.”

[“시이 선배. 준비 다 했어요? 3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아요.”]

전화를 받자마자, 알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원래 알터가 학교에 가는 길에 시이의 집이 있어서 이따금 시이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등교하고는 했다. 그래도, 사실은 집 앞까지 찾아오게 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괜히 부끄럽기도 해서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알터의 목소리가 어쩐지 시무룩한 것 같아서 수락하고야 말았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알터와 아침부터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좋아서 시이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집 앞까지 찾아와 주는데 오래 기다리게까지 할 수는 없어서 시이는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머리를 덮고 있던 수건을 걷어, 빨래통에 잘 던져 넣은 뒤 얼굴에는 수분 팩을 올린 채 헤어드라이어의 전원을 켰다. 위이잉 소리를 내며 따뜻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바람결에 물에 젖어 있던 머리를 다 말리고 얼굴에 얹은 팩도 떼어내어 버리려는데 다시 한번 휴대폰이 울렸다. 르웰린이었다.

“르웰린? 무슨 일이야?”

[“학교 가는 길이라 선배 집 앞에 들렀는데 출발했나 해서요.”]

“아…, 나 아직 출발 안 하긴 했는데. 벌써 도착한 거야?”

[“네. 늦어도 되니까 천천히 내려와요.”]

“응. 알겠어! 근데 조금 있으면 알터도 올 거야.”

[“……알터가요? 아, 네… 어쩔 수 없죠. 같이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러고 보니 르웰린의 집도 시이의 집에서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종종 집 앞이나 등교 중에 마주치면 같이 등교하고는 했다.

르웰린과 짧은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시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마지막에 르웰린 목소리가 좀 바뀐 거 같았는데 감기라도 걸린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털어버렸다. 중요한 건 곧 알터가 집 앞에 도착한다는 것이었으니까.

시이가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시이의 집 밖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먼저 도착해서 시이를 기다리고 있던 르웰린의 곁으로 알터가 도착했다. 알터는 르웰린이 왜 시이의 집 앞에 서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면서도 반가운 얼굴이라 손을 흔들며 그에게 인사했다.

“르웰린,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시이 선배 기다리려고. 너는 어쩐 일인데?”

“아…, 어, 그렇구나. 나도 마찬가지야. 선배 기다리려고.”

르웰린은 알터가 올 거라는 걸 이미 시이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르웰린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알터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이의 집 앞에 나란히 서서, 시이가 얼른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원래 이렇게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다. 자신과 르웰린은 같은 반이기도 하고 동아리도 같은 동아리에 들었으니, 다른 친구들보다 더 깊은 우정을 나누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사이에 시이가 있었다. 시이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듣기로는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거기다 상냥하고 후배들에게도, 동급생에게도, 선배들에게도 늘 친절한 모습을 보여서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물론 질투 어린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시이의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걸 전교생이 알고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반면에, 알터 그 자신은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공부는 곧잘 하는 편이고 노력도 꾸준히 하지만, 시험 성적은 편차가 심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실시한 모의고사 성적 또한 지난 1년간 살펴보면 편차가 너무 심해서 담임 선생님과 여러 번 상담했을 정도였다.

그런 자신과 다르게 시이는 지금까지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데다가 늘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선생님 심부름에, 도서부 일에 학급 임원으로의 일까지 뭐 하나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제 부족한 모습을 채워줄 수 있는 시이에게 알터의 마음이 이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알터는 생각했다.

한번 자각하게 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크기를 불려 갔다. 감히 자신 같은 사람이 시이의 곁에 서 있어도 되는가 싶어서 애써 억눌러 보려고도, 인정하지 않으려고도 해보았지만, 마음은 그리 쉬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았다.

그러니 알터는 시이가 너무 좋은데, 그 감정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몇 번 르웰린에게 연애 상담을 하다가 어색해졌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학기 중에는 자주 붙어 다녔는데 방학 기간에는 연락을 주고받은 게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서 어색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어색함을 느끼는 게 자신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터는 최대한 의연한 척, 휴대폰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아까 선배에게는 30분 정도 걸릴 거라고 말했으니, 그즈음 돼서야 나올 거라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아, 싱숭생숭한 마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시이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알터는 문득, 시이를 처음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 * *

 

알터가 처음 시이를 봤던 건 학교의 도서실이었다. 시험 기간에 조용히 공부할 곳이 필요해서 방문했던 학교의 도서실은 그 후로 알터의 일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몸이 늘어지던 봄날. 알터는 시이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이런 애가 있었던가?

워낙 사람이 좋고 성격이 둥글둥글한 편이라 알터의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원하든 원치 않든 알터는 대인 관계가 좋은 편이었고 발도 넓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같은 학교의 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데도 낯선 얼굴에 시선이 끌렸다.

시이는 의자에 바르게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옅은 크림색의 머리칼은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했고 새초롬한 눈매는 책을 보느라 아래로 살짝 내리깔고 있었다. 빛을 받아서 그런지 유난히 더 하얘 보이는 얼굴에 오밀조밀한 인상은 예쁘다는 말보다는 귀엽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 듯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던 시이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서 시이를 살피던 알터가 허둥지둥 고개를 돌렸다. 그때, 시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이제 도서실 문 닫아야 해서.”

“아, 네…! 지금 나갈게요…!”

알터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공부를 하느라 꺼내놓았던 교과서며 노트며 필기구며 가방에 전부 쏟아 넣고는 벌떡 일어나 서둘러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어쩐지 뒤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린 듯했다.

도서실을 빠져나와 자신이 보이지 않게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알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복도 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엉덩이에 전해지자,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알터는 얼굴을 제 손에 묻은 채, 한숨을 길게 내쉬다 비척비척 일어났다.

노을이 비치는 복도를 걸어가는 알터의 발걸음이 어딘가 지쳐 보였다. 심장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미친 듯이 뛰어댔다. 얼굴에는 괜히 열이 몰려 화끈거렸으며 자신에게 말을 걸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미친 듯이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알터는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알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과연 이런 것일까. 책에서나 보았던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머리칼이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던 탓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게 너무 아쉬웠다.

다음날, 알터는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다시 도서실을 찾았다. 하지만 도서실 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어제 보았던 그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도서실을 나가려는데, 도서실 문을 연 순간 어제 보았던 연한 크림색 머리칼이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 저기……!”

“응…?”

알터가 자기도 모르게 제 옆을 스쳐 지나가던 시이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라, 곧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내긴 했지만.

알터는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이와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러고는 어제처럼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하게 포장한 걸 꺼내어 내밀었다.

“아, 나한테 주는 거야?”

“네, 네…! 어제… 도서실에서 너무 늦게 나가서 죄송하기도 하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고마워. 잘 받을게.”

시이가 부드럽게 웃으며 알터가 건넨 것을 받아 들었다. 알터는 시이의 부드러운 미소에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이고서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후다닥 도서실에서 나와 교실로 돌아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려서, 혹시 이 소리가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어라, 알터. 너 어디 아프냐?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아, 조금 뛰었더니… 그런가 봐. 아픈 데는 없어.”

“그러냐? 그럼 다행이고. 아, 혹시 나 이것 좀 가르쳐줄 수 있어? 계속 풀어봐도 이해가 안 되네.”

“당연하지…! 그, 근데… 나 같은 애한테 배워도, 괜찮을까…?”

“너 같은 놈이라니! 네가 그런 말 하면 나는 뭐 나가 죽어야 하냐?”

알터가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동급생인 친구가 알터의 목에 제 팔을 두르고는 헤드록을 걸며 장난스레 핀잔했다. 헤드록을 걸긴 했지만, 장난스럽게 팔을 두른 것이라 조금도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친구에게서 빠져나온 알터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 알터의 옆에 앉아서 교과서를 펼쳐 보였다.

알터는 과연 도움을 줘도 될지 고민했지만, 친구가 계속 채근하는 바람에 상념을 끊고 친구의 질문에 친절히 답을 해주었다. 알터의 설명을 들으면서 친구가 이해했다는 듯, 아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명은 잘하고 있는 건지, 자신 따위가 정말 친구에게 도움은 되는 건지,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지만 우선 친구가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냈기 때문에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알터가 자기 눈치를 살피면서도 순순히 대답을 해주는 것을 들으며 친구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 그런데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어어. 물어봐. 뭔데?”

“혹시… 도서실에, 연한 크림색 머리, 누군지 알고 있나 해서…….”

“연한 크림색 머리? 으음…, 잠시만. 야! 너 도서부지!”

알터의 질문에 친구가 턱을 집고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더니, 마침 자리 옆을 지나가던 다른 동급생 한 명을 붙잡았다.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라 서둘러 자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동급생은 친구의 질문에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더니 이내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지 답해주었다.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아는 연한 크림색 머리 가진 사람은 우리 동아리 선배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그분도 도서부야…?”

“네. 2학년 선배예요.”

때마침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 바람에 알터는 더 궁금한 것을 묻지 못했다. 같은 반 친구이긴 한데 아직 학기 초라서 그리 친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붙잡아서 더 물어보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알터는 이상하게 수업에 집중이 되질 않아서 교과서만 펼쳐둔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자, 체육 수업이 있는지 운동장을 돌아다니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학생들 중에서 알터는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반과 합동 수업을 하는지, 학생 수가 그리 적지도 않았고 그 사람의 체구도 작아서 학생들 틈에 끼면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어쩐지 그 사람의 모습은 알터가 한눈에 찾아낼 수 있었다.

밝게 웃으며 같은 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 사람을 보자니,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절로 얼굴에 열이 몰리며 벌겋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알터는 창밖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돌려 칠판에 고정했지만, 수업 내용은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쿵쾅쿵쾅 뛰어대는 제 심장 소리만 크게 들려올 뿐이었다.

옆에서 친구가 걱정스럽게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알터에게는 친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교과서와 함께 펼쳐둔 노트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던 알터의 머릿속에 순간,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하나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 자신이 도서부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알터가 다니는 학교는 동아리 활동을 무조건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정말 자신이 원하는 사람만 동아리 활동을 하면 돼서, 알터는 굳이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니 도서부에 들어갈 때 절차상 아무런 하자도 없었다.

아니, 그 선배가 정말 자신이 찾던 선배인지는 모르니까 우선 도서실에 가서 다시 한번 만나 보고… 그다음에 도서부냐고 묻고… 도서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평범한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알터에게는 그저 신이 내려준 절호의 기회처럼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 듯 느껴졌다. 빨리 수업이 끝나서 도서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렇게 유난히 느리게 시간이 흘러간 끝에 수업 종료를 알리는 멜로디가 학교 안을 가득 채웠다. 알터는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께서 여기서 끝이라고 말씀하시자마자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교실을 빠져나와 도서실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전 수업이 체육 수업이었으니 도서실에 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도서부라고 해서 쉬는 시간마다 무조건 도서실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동급생이 말해준 그 ‘시이 선배’가 자신이 찾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도서부가 아닐 수도 있고 그러면 더더욱 매번 도서실에 올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한껏 달아올랐던 머리가 그제야 푹 식었다. 그래도 어제나 오늘 도서실에서 마주친 것을 보면 도서실에는 자주 오는 것 같으니까, 앞으로 틈만 나면 도서실에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터는 실망감도 잊고 그 작고 오밀조밀 귀여운 얼굴을 다시 볼 생각에 설레기만 하는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그렇게 찾아온 점심시간. 알터는 누구보다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 열심히 이를 닦은 다음, 서둘러 도서실로 향했다. 도서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굳이 도서실을 찾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알터는 떨리는 마음을 안고 도서실 안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다행히 다른 학생은 없었다. 그 사람도 없는 것인가 싶어서, 조금 아쉽고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 저 구석 창가 자리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작은 체구의, 연한 크림색 머리를 가진 여학생이었다. 조금 가라앉았던 알터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알터는 책장을 돌아다니며 읽을 책을 대충 꺼내 들고서 그 사람의 대각선 맞은편 자리에 슬쩍 앉았다. 알터는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책에 집중하고 있는 걸 깨닫고 슬쩍 명찰을 살폈다.

시이.

시이… 시이……. 아, 이름 예쁘다.

알터는 입안에서 구르는 그 이름조차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다시금 열이 몰렸다. 알터는 의연한 척하면서도 힐긋거리며 시이를 보았다. 시이가 눈을 내리깔고 허리를 곧게 편 채 책을 읽는 모습에 알터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간질일 때처럼 가슴이 간질간질해, 실실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면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슬쩍 자리를 한 칸 옮겨 맞은편 자리에 앉아도 시이의 시선은 책에서 떨어질 줄은 몰랐다. 그러다 책은 펼치지도 않고 시이만 살피던 알터는 시이가 고개를 들자, 퍼뜩 놀라며 책을 들어 올리고는 열심히 읽는 척을 했다.

책을 거꾸로 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시이는 흘깃 알터가 있는 곳을 살피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알터의 앞에 슬쩍 놓았다. 작게 포장한 간식거리였다. 알터가 제 앞에 뭔가 놓이자, 책을 내리고는 그걸 들어 올려 슬쩍 시이를 보았다.

“허억…!”

시이가 고개를 든 채 알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을 것 같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알터가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시이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담고서 알터를 살피다 말했다.

“미안해. 아까 준 초콜릿 잘 먹었다고 말하려고 한 건데…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

“아, 아니에요…! 괘, 괜찮습니다…! 저, 안 그래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뭔데?”

“그러니까 제가… 제가… 도, 도서부에 들어가고 싶어서요…!”

알터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도서부? 시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서부는 들어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만 동아리 활동을 하면 된다는 학교의 기조에 학생들은 자신이 관심 있는 동아리가 아니면 그냥 동아리에 들지 않는 것을 택했고, 개중에 실행력이 강한 학생들이 새로운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니 새로운 부원이 들어온다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시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실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으니 괜한 이유로 도서부에 들어오겠다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성실한 학생이라면 그게 누구든 환영이었다.

“그러면 오늘 방과 후에 도서실로 찾아올래? 부원들 소개해 줄게. 마침 오늘 다 모이는 날이라서. 그리고 도서부에 들어오면 도서부 활동을 하긴 해야 하는데, 도서부 활동이라고 해도 돌아가면서 도서 위원 맡는 거랑 도서실 정리만 하면 돼서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네, 네……! 그러면 이따가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러면 이따가 올 때 이것만 작성해서 와. 고문 선생님도 오실 거니까 그때 드리면 될 거야.”

“네, 선배님…!”

“선배님은 무슨. 그냥 선배라고 해.”

“네, 시이 선배…!”

알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눈으로 시이를 보았다. 어쩐지 동경하는 롤모델이나 아이돌을 보는 듯한 눈빛이라,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알터는 시이가 건네준 입부 가입서를 소중히 받아 들고서 먼저 교실로 돌아가 보겠다며 꾸벅 인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얼핏 드러난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듯했다.

 

* * *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두 사람이 기다리던 아파트 공동현관의 문이 열리며 시이가 밖으로 나왔다. 봄이 됐다고는 해도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아, 퍽 쌀쌀한 날씨였다. 그래서 시이는 동복 교복에 위에는 베이지색의 코트를 걸친 채 두 사람에게로 걸어왔다.

햇빛을 받아 평소보다 더 푸르게 빛나는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두 사람을 만나서 반갑고 기쁜지,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가 걸어오는 듯해 보였다.

알터는 저도 모르게 제 심장께를 부여잡았다. 방학이 지나고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시이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파괴적이었다. 알터는 곧 터져 버릴 기세로 뛰어대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시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알터를 살폈다. 맑은 하늘을 담은 듯, 푸르게 빛나는 시이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알터가 숨을 헉, 들이마셨다.

“알터?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아, 네…! 괘, 괜찮아요!”

알터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시이는 그런 알터가 걱정스럽고 몸도 좋지 않은데 집 앞까지 찾아오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터는 끈질기게 이어지는 시이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정말 괜찮아요, 선배.”

알터가 마치 시소를 타듯 널뛰던 감정을 겨우 갈무리하고는 괜찮다는 듯, 시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알터의 부드러운 미소를 본 시이가 귀 끝을 옅게 붉혔다. 옅은 크림색 머리칼이 가리고 있어서 알터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르웰린의 눈에는 훤히 들여다보였다.

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저렇게 훤히 내보이고 있는데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게다가 알터와는 같은 반인 데다가 동아리까지 같은 동아리에 들어갔으니 알터의 감정이 시이를 향해 있다는 건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알터 혼자만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이 또한 알터를 눈으로 좇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마음 편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기가 힘들었다. 르웰린, 그 자신 또한 시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르웰린이 시이를 가만히 보았다. 하지만 시이는 마치 이 세상에 알터와 자신, 단 두 사람만이 남아 있다는 듯 알터만을 보고 있었다. 분명 알터의 옆에 자신도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알터만 보인다는 듯 행동하는 시이에게 르웰린이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에요, 시이 선배.”

“어…? 아, 르웰린! 그러게. 우리 방학하고 처음 보는 거지? 미안해. 나 때문에 오래 기다렸겠다.”

“아니에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알터도 괜찮을 거고요.”

“그럼요! 저도 괜찮아요. 이제 출발할까요?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알터의 양 뺨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아까 시이를 막 보았을 때보다 발갛게 물들어 있지는 않았다. 르웰린은 그런 알터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시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이는 여전히 알터만 걱정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아래로 손을 내린 르웰린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자신에게는 시선도 주질 않는 시이를 보니, 못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시이와 알터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런 좋은 사람들을 이간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만 해도 경멸스러워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저, 시이를 바라볼 수 있고 함께 곁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알터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시이를 보았고 시이 또한 알터만 보고 있었다. 시이를 사이에 두고 선 르웰린은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학기 중에는 거의 매일 얼굴을 보다가, 고작 두어 달 남짓한 시간이기는 해도 오랜만에 시이를 보는 것이다 보니, 괜히 처음 시이를 보았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 * *

 

르웰린은 시이가 그랬던 것처럼 수석으로 입학했다. 가족들이 대부분 이 학교를 나왔고, 수석을 놓친 적이 없으니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에서도 지금 다니고 있는 이 학교가 명문으로 유명했으니, 그중에서도 수석으로 입학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굳이 자신이 어느 집안의 자제인지를 떠들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으나, 르웰린 이름 뒤에 붙은 ‘신시엘라크’라는 성은 그가 그 유명한 신시엘라크 가문의 자제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시엘라크라는 성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 와, 몸에 자연스럽게 밴 행동은 입학식에 참가한 동급생들이 르웰린을 선망 어린 시선으로 보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다가가기 조금 어려워했으나, 르웰린이 자기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고 누군가를 압박한다거나 안하무인으로 나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금방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르웰린이 은근히 쳐 놓은 선을 넘어간 사람은 없었지만, 르웰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기에게 다가온 사람들을 친절히 맞이했다.

꽃샘추위가 가시고 날이 한결 따뜻해졌을 무렵, 봄꽃이 피어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던 때였다. 학기 초의 어수선함이 어느 정도 가시고 반 분위기도 정돈되었을 무렵, 르웰린은 도서부에 들어가기 위해 도서부 고문 선생님을 찾아 교무실로 향했다.

책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고 성적뿐 아니라 학교생활 자체도 완벽하게 채우고 싶었다.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도서부를 선택한 이유는 도서부원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동부는 사람도 많은 데다가 부 활동에 집중하면 성적 관리에 소홀해질 것 같았고 다른 동아리도 동아리 활동이 매우 활발한 편이어서 부 활동이 그렇게 활발하지 않으면서, 사람이 적은 동아리인 도서부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적어, 고민하고 있었는지 르웰린이 입부 가입서를 제출하자 도서부 고문 선생님의 표정이 환해졌다. 르웰린은 같은 반 아이들뿐 아니라, 1학년 아이들 대부분이 잘 따른다고 알려져 있으니 르웰린이 도서부에 들어온다면 그를 따라서 들어올 아이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시이가 그랬듯 같은 학년 친구들에게 인망이 높은 르웰린을 보며 고문 선생님은 기쁜 마음으로 르웰린이 건넨 입부 가입서를 받아 들었다.

“오늘 방과 후에 도서실로 와요. 부원들 소개해줄게요.”

“네, 선생님.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따 방과 후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이따 봐요.”

수업이 모두 끝난 방과 후. 르웰린은 조용히 가방을 챙겨 도서실로 향했다. 고문 선생님께서 도서실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르웰린은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선생님과 함께 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실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책 냄새가 르웰린을 반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르웰린은 시이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시이는 맑은 하늘을 담은 듯 푸르게 빛나는 눈을 둥글게 휘며 르웰린을 반겨주었다. 하얀 얼굴 위로 떠오른 말간 웃음이 르웰린의 시선을 빼앗았다.

“안녕, 우리 도서부에 온 걸 환영해. 1학년이라고 들었는데, 말 편하게 해도 될까?”

“네. 반갑습니다. 1학년 르웰린 신시엘라크입니다. 르웰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선생님께서 르웰린을 소개해주고 도서부 부장이 나서서 르웰린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르웰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른 부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보다 먼저 도서부에 가입한 다른 반 친구도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부장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르웰린의 신경은 온통 시이에게로 쏠려 있었다. 부장이 간단하게 도서부가 하는 일, 이번 학기 일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르웰린은 그걸 들으며 성실히 필기까지 하고 있었지만, 대각선 자리에 앉은 시이를 연신 흘깃거렸다.

그러다, 시이의 푸른 눈동자와 르웰린의 청보랏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시선을 돌리다 우연히 마주친 시선에 시이가 살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가, 르웰린이 시선을 돌리지 않자 부드럽게 웃으며 눈을 휘어 보였다. 그 눈웃음에 가슴이 술렁거리고 감정이 요동쳤지만, 르웰린은 익숙하게 제 동요를 감추고 시이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인 뒤 열띤 설명을 하고 있는 부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심장은 술렁거렸고 감정은 요동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었다.

새로 1학년이 더 들어와서 그런지 부장은 한껏 신이 난 상태였다. 자기가 졸업해도 도서부의 명목은 이어갈 수 있을 거라며 감격스러워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도서부를 찾는 학생이 많지 않다 보니까, 일정 인원을 충족하지 못하면 폐부가 될까,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시이! 네가 맡아서 1학년들 잘 이끌어 줘야 한다. 3학년인 나보다, 2학년인 네가 더 부담도 덜 할 테니까. 알겠지?”

“알겠어, 부장. 걱정하지 마.”

부장의 느닷없는 말에도 시이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시이는 믿음직스러운 눈빛으로 이번에 새로 들어온 르웰린과, 다른 1학년 부원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었다. 사전에 이야기한 적 없는 일인 것 같았지만, 시이는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부장의 장단을 잘 맞춰주었다. 오히려 시이보다 다른 부원들이 당황한 듯한 모습을 더 많이 보였다.

부원들의 당황스러운 시선에도 부장은 하하, 호쾌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여, 시이와 르웰린 사이의 접점이 생겼다. 시이를 처음 본 순간 낯선 감정을 느끼긴 하였지만, 만약 시이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르웰린은 금방 그 감정을 잊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시이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르웰린이 괜한 핑계를 대며 시이를 찾아가 시간을 빼앗아도 인상 찌푸린 적 한 번 없었다. 오히려 언제든 찾아오라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을 뿐이었다. 시이를 시험하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마치 시험하려 한 것처럼 된 것 같아서 오히려 르웰린의 마음만 불편해졌다.

그렇게 르웰린이 도서부 활동에도 익숙해지고 반 친구들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쌓였을 때쯤, 시험 기간이 찾아왔다. 아직 1학년이고 첫 시험이어서 그런지 다들 그리 긴장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가장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은 동급생 한 명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너무 긴장한 것 같으면 며칠 지켜봤다가 시험 전에 풀어줄 생각이었는데, 시험을 사흘 앞두었던 날 시이가 새로운 부원이라며 그 동급생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알터가 제게 도서실에서 만난 어느 여학생에 관해 물었던 것이 기억났다.

알터의 시선 또한, 자신이 그랬듯 시이만을 향해 있었다.

 

* * *

 

문득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르웰린의 시선이 다시 한번 알터에게로 향했다. 알터와는 이번에도 같은 반이 되었고 시이는 도서부의 부장이 되었다. 시이 선배가 도서부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르웰린과 알터는 도서부를 절대 그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시이가 졸업을 하는 내년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올해까지 시이와 알터의 저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 마음이 어떻게 되든, 생각 같아서는 그냥 당장 서로에게 고백하라며 등 떠밀고 싶었다. 하지만 또 평생 알아채지 못하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었다.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게 눈에 빤히 보였지만, 두 사람은 자기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지 서로에게로 향하고 있는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히려 주변에서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 서로 왜 안 사귀고 있는 거냐, 저게 선후배 사이면 난 선후배 없다는 등 수군거릴 만큼 애틋했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알터는 자기가 시이의 곁에 설 사람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이의 곁에는 저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 그리고 시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면서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럴 거면 차라리 고백이라도 하고 차이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해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시이 또한 알터를 향한 자신의 마음은 자각하고 있었으나, 알터가 확신을 주지 않으니 제 마음을 쉬이 밝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옆에서 보기에 답답하기도 했지만, 르웰린은 그래서 차라리 잘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알터와 시이가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어 둘이 이어지게 된다면, 자신은 지금처럼 시이의 곁에 알터와 나란히 서서 걷지 못할 테니까. 그때는 원치 않아도 알터에게 시이를 양보해 줘야 할 테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자리에서 비켜나고 싶지 않았다.

“저희도 이만 교실로 가 볼게요, 선배.”

“아… 그렇지. 너희 2학년이었지……. 이번에도 같은 반 된 거야?”

“네. 정말 잘 됐죠! 아는 사람 많이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르웰린이랑 같은 반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응. 잘됐다, 정말. 그러면 나도 이만 교실로 들어가 볼게. 이따 보자.”

“네, 선배!”

알터가 시이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인사를 나누고는 몸을 돌렸다. 계속 바라보고 있어 봤자, 미련만 남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르웰린도 시이와 인사를 나누고 몸을 돌리려다, 시이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을 느꼈다. 그 시선은 평소 시이가 자신을 향해 보내던 눈빛과는 달랐다. 하지만 이따금 느껴본 적이 있는 눈빛이었다.

후배가 아니라, 질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눈빛.

시이의 성정이 워낙 다정하다 보니, 그 시선에서 악의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시이는 분명 자신을 부러워하고 있다고 르웰린은 확신했다.

자신을 이성이 아니라 그저 부러워하는 대상, 그리고 질투심을 느끼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그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았다. 르웰린은 벌써 교실로 들어가 버린 시이의 뒷습을 살피며 고작 그런 시선을 받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서 쓰게 웃었다.

르웰린이 입가에 쓴웃음을 매단 채 알터를 흘깃 보았다. 알터는 오늘 시이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면서도 우리 반에 어떤 애들이 오게 됐을까, 기대된다며 르웰린을 돌아보았다.

“저도 기대됩니다. 알터.”

그렇게 새 학기의 아침이 밝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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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진짜 마음에 드는 글커미였음…

특히 르웰린 심리 묘사가 너무 마음에 들었음

'고작 그런 시선을 받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서 쓰게 웃었다.' 이거 너무 좋아 ㅁ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