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웰시이] 두두섬 - 연화님

c. 연화님

 

신시엘라크 가문의 장자이자 알반 기사단의 일원으로 온갖 비밀스러운 정보를 접하는 르웰린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에린의 구석구석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두근두근 섬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장소는 꽤 낯선 곳이었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방법으로만 갈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한 번 열리면 수많은 밀레시안들이 들르는 곳이니 딱히 에린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가 나타날 리도 없고, 나타난다 한들 순식간에 토벌되고 말겠지만 그는 늘 만약에 대비해야 하는 위치였다. 물론 대개의 경우 이 대비란 적절한 인선을 해당 지역에 파견하는 것 정도로 이루어지기 마련이지만 이번은 조금 특별했다. 마침 그가 제법 한가로웠고 시이를 본지 꽤 오래되어 전해야할 소식이 쌓였으며 드물게도 던바튼 근처에 확인해봐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근두근 섬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확인해 보는 건 르웰린의 몫이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시이가 오게 되면 그를 찾으라 편지로 신신당부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랜만에 기사단의 갑옷도, 화려한 정장도 아닌 단촐한 옷차림을 한 르웰린은 던바튼 근처의 임무를 처리한 다음 두근두근 섬의 해안가에 도착했다. 밀려드는 바다 내음 사이사이에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고개를 들자 각양각색의 차림을 한 밀레시안들이 모래에서 무언가 찾아내고 낚시를 하며 분주히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문득 그는 평범하다고 생각한 그의 차림이 이곳에서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이 아닌지 고찰했다. 각자의 개성을 한껏 추구 하고 있는 밀레시안들이 너무 많았다. 차라리 화려한 기사단의 갑주 차림이 눈에 덜 띌 것만 같았다.

"저기요, 이 섬에는 처음 오시나요?"

활기찬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특별조의 슈안과 같은 난해한 감각의 안경을 낀 남자가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다난이신가 보군요. 밀레시안 분들이 많아서 놀라셨죠? 괜찮습니다. 여기는 다난 분들도 꽤 오시거든요. 아,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 섬에 방문하신 분들의 소울메이트를 매칭해드리는 그레고라고 합니다. 어떠신가요? 이 섬에서 운명의 상대를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레고는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말을 우르르 쏟아냈다.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 슈안을 연상시키는 모습에 르웰린이 그린듯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선을 그었다. 휘말리면 피곤해질 것 같기도 했거니와 그에게 소울 메이트 매칭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소울 메이트 같은 게 존재한다면 함께하고 싶은 존재는 따로 있었고,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은 의미가 없었으니까.

"아쉽군요. 마음이 바뀌신다면 언제든 저, 그레고를 찾아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이 마을의 장로님은 어디를 가면 뵐 수 있을까요? 따로 여쭤볼게 있거든요."

"장로님이요? 장로님이라면 제 뒤의 길을 따라 쭉 올라가시면 나오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됩니다."

르웰린은 짧게 감사인사를 한 뒤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났다. 밀레시안들은 그들의 일을 제외하고는 별 관심이 없다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다. 괜히 이런 곳에 들렀다는 소문이 나서 좋을 건 없었다. 다행히 장로인 케렌자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혹시 근처에 이상한 일은 없었는지, 유념할만한 사건사고는 없는지 적당히 질문을 주고받은 르웰린은 섬의 안전만 확인하고 길게 줄을 선 밀레시안들에게 서둘러 자리를 양보했다. 다들 감자며 개다래 열매, 연어 같은 것들을 한아름 들고 있어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약간의 분투 끝에 간신히 케렌자의 집 앞에서 벗어나 한숨 돌린 르웰린은 그대로 익숙한 푸른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밀짚 모자를 쓰고 가벼운 흰색 원피스를 입은 시이가 호미를 든 채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르웰린?"

"시이님? 거기서 뭐 하고 계신건가요?"

"그야, 장로님 일을 도와드리고 있었지? 도와드리면 예쁜 부케도 주시거든. 잠시만, 금방 끝나!"

호미를 꽉 쥔 시이가 정신을 집중하자 주변에 반짝임이 내려앉았다. 르웰린은 그 힘이 뭔지 알았다. 검은 달의 교단이라는 자들이 주로 쓰던 본질을 다루는 힘. 어쩌면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모자라지 않은 힘이었으며, 저건 그 중에서도 세계의 감춰진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시이는 그 힘을, 감자 캐는 데 쓰고 있었다. 시이답다면 시이다운 일이리라. 시이를 영웅이라 불리게 만든 모든 시련은 결국 아주 사소한 부탁들에서 시작했으므로. 그 사소한 부탁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 결국 그를 영웅으로 만든 가장 고귀한 부분이라서. 물론 그것이 지금 상황을 덜 황당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르웰린은 에린의 가장 고귀한 영웅이 신의 선물과 같은 힘으로 감자 한 무더기를 동시에 캐내다 호미로 잘못 찍어내려 몇 개를 못쓰게 만드는 광경을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얼굴과 무릎에 흙까지 묻히고 돌아온 시이는 환하게 웃더니 그에게 꽃잎 바구니 하나와 밥, 양념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마침 잘왔어, 르웰린. 여기 꽃 비빔밥 만드는 것만 도와줄 수 있어? 다른 건 어떻게든 하겠는데 요리는 도저히 자신이 없거든."

르웰린은 얼떨떨하게 요리도구와 재료를 받아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도 요리에는 크게 조예가 없었다. 딱히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음식 준비는 사용인들이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메뉴가 비빔밥인 건 다행스러웠다. 딱히 요리 솜씨는 필요없고 재료가 뭉개지지 않게 예쁘게만 섞어서 플레이팅 하면 끝인 음식. 르웰린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저만치에서 개다래를 따기 시작한 시이를 한 번 봤다가 얕게 한숨을 쉬고 꽃 비빔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양념과 밥을 섞고 꽃을 적당히 위에 뿌리자 나름 봐줄만한 요리가 탄생했다. 맛은 보장할 수 없었으나 르웰린은 시이가 만든 것보다 나을 거라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 만들어진 양념을 썼는데 설마 맛이 없기야 하겠는가. 금세 개다래 열매를 따온 시이는 르웰린의 손에서 완성된 음식을 가져가더니 후다닥 케렌자에게 전달해주고는 웃으며 돌아왔다.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었다.

"좋아! 오늘 도와드릴 건 다 도와드렸어. 매번 요리가 걱정이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잘 됐네. 그나저나 오면 말을 하라니까, 왜 몰래 온 거야."

"눈에 띄는 연락은 최소화 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어차피 좁은 섬이니 찾는 건 금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큰 섬은 아니지만 사람은 무시 못하게 많은 걸. 아차, 일은 다 했어?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임무라고 해봐야 어떤 섬인지 간단히 알아보는 것 뿐이었으니까요."

조금 걱정스레 변했던 시이의 얼굴이 그제야 폈다. 이상하리만치 허술한 평소의 성격이 어디가지 않는지 또다시 아차 하고 가방을 뒤적거린 시이는 녹색과 푸른색이 조화롭게 엮인 부케 하나를 꺼냈다. 어떻게 구한 건지 알터와 시이의 눈 색을 꼭 빼닮아 있어 듣지 않아도 목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이어진 알터에게 전해달라는 말에 르웰린이 부케를 받아 이리지리 돌려보았다. 특별히 귀한 꽃을 쓰지는 않았지만 공들여 엮은 티가 나는 꽃다발이었다. 단장실 책상 위에 꽂혀 교단의 보물보다 귀한 취급을 받고 있을 걸 생각하니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꽃, 시들지는 않겠죠?"

"당연하지. 그정도 처리는 돼있어."

그래도 꽃이 시들어 가면서 같이 시들시들해지는 알터까지는 보지 않아도 될 모양이었다. 르웰린은 꽃이 상하지 않게 잘 챙기고 알터가 부탁한 편지 한 뭉치를 꺼냈다. 시이를 만나러 온 건 그인데, 정작 시이가 그를 똑바로 쳐다본 건 꽃 비빔밥 만들기를 부탁할 때 뿐이었다는 사실이 유치하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삐죽거리는 생각을 애써 밀어내며 편지를 건네자 여태껏 보지 못한 해맑은 웃음이 돌아왔다.

"고마워, 르웰린!"

"부엉이라고 부르지는 않으시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당장 편지부터 펼쳐보려던 시이가 그의 눈치를 슥 보더니 편지를 집어넣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그와 알터가 르웰린에게 이런저런 잡다한 부탁을 많이 한 건 사실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길었다. 부엉이를 자주 보내는 것 금지, 무언가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걸 전달하는 건 당연히 금지, 자주 만나는 것도 금지. 이 모든 걸 어떻게든 우회해서 편지나 선물 같은 걸 전할 방법은 르웰린 뿐이었다. 그게 적절한 방법이었느냐 묻는다면 난감했지만 말이다.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흠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굴리던 시이는 여기까지 왔으니 섬 구경이라도 하자며 르웰린을 잡아끌었다. 빤히 보이는 화제 전환이었지만 르웰린은 모른척 따라가 주기로 했다. 이 이상 삐딱하게 굴어봤자 얻을 건 시이가 쩔쩔매는 모습 뿐이고 그건 딱히 지금 보고 싶은 모습이 아니었다. 섬에 얼마나 있었던 건지 그의 손을 잡고 막힘 없이 달린 시이는 형형색색의 천이 휘날리는 곳으로 그를 데려갔다. 천연 염료를 만드는 곳이었다.

"이거 꽤 재미있어. 예쁜 색을 만들면 기분이 좋기도 하고."

불쑥 내밀어진 바구니에서 달달한 열매의 향기와 풀내음이 섞여났다. 르웰린은 제가 입은 옷을 잠시 들여다봤다가 소매를 살짝 걷어올리고 손을 뻗었다. 어차피 수수하게 차려입고 왔으니 다 돌아다닌 뒤에 갈아입으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부분이 재미있는 건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이리 저리 색을 섞다가 결국 지나치게 어두워진 염료를 보고 머리를 싸매며 재도전 하는 시이를 구경하는 건 분명 즐거웠다.

"역시 뭔가 만드는 건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르웰린은 어때, 괜찮은 염료 만들었어?"

"흐음, 잘 모르겠네요. 제가 색감각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아서 말이죠. 시이님이 자주 쓰시는 색과 비슷하게 하려고 노력은 했는데, 괜찮은가요?"

"잘 만들었는데? 어떻게 한 거야? 르웰린, 이거 오늘 처음 했잖아!"

사실 며칠 만들어 보려다 포기했었다며 폴짝 뛴 시이가 안내원에게 달려가 염료를 따로 담아왔다. 빛에 비춰본 염료의 색은 르웰린의 관점에서도 시이의 색과는 조금 달랐지만, 시이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단지 그가 만들어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저 염료는 시이의 어떤 옷을 물들일까. 어쩌면 시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들이 으레 들어가는 가방에 들어갈지도 모르지. 알터의 선물만큼 소중해질 수는 없겠지만, 르웰린은 시이가 자신이 준 걸 아낄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절반은 흐물흐물 풀어지고 절반은 여전히 심술궂게 꼬인 실이 르웰린의 속에서 팽팽히 당겨졌다. 르웰린은 애정이라는 이름의 실이 결국엔 아주 사소한 일로 전부 흐물흐물하게 풀어져버릴 것을 알았다. 그것이야말로 애정이란 감정의 본질이었으므로. 그러니 시이가 약간 풀 죽은 얼굴로 그의 머리색과 꼭 닮은 보라색 염료를 꺼냈을 때, 남은 실타래가 전부 풀려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사실 어제 미리 만들어뒀어. 오늘 멋지게 성공한 척 하려 했는데 틈이 안 나서, 아무튼! 그것도 내가 만든 거야. 나도 이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거지."

"저 주시는 건가요?"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았다는 듯, 염료를 빤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챙기는 르웰린의 모습에 시이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이렇게까지 소중히 챙길 줄은 몰라서 더 민망했다. 다, 당연하지. 다음에는 더 잘 만들어 줄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티나게 떨려서 르웰린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정리했다. 기쁨은 가까운 상대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았을 때 정도로만 표하면 충분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럼 선물도 챙겼으니 저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복귀해야 하는 시간도 되어가고,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분도 계시니까요."

"그래. 부케 잘 부탁해, 르웰린. 조심히 가고!"

그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시이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기사단에 복귀해 특별한 사항은 없었음을 보고한 르웰린은 마지막으로 알터에게 붙잡혀 부케를 전해준 뒤 약 한 시간에 걸친 감탄과 행복의 탄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원래라면 피곤하고 귀찮았을 시간이지만 르웰린은 이번만큼은 인내심 있게 알터의 말을 들어주었다. 시이에게 알터가 아닌 그를 생각하는 시간도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알터가 느끼는 기분의 편린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에 대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이다.